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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환 칼럼] '이오로(伊吾盧) 전투'의 진실
맞다. 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통상 신채식의『동양사개론』에 "녀진족은 건주(建州)·해서(海西)·야인(野人)의 3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누루하치는 먼저 가장 남쪽에 거주하는 건주녀진 부족을 장악한 후에 나머지 부족을 통합하여 1616년에 後金(뒷날의 청)을 건국하였다."고 한 것을 익히고 있거나, 신룡철 등 14명이 지은『東洋의 歷史와 文化』에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야인녀진(野人女眞),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해서녀진(海西女眞), 무단강(牧丹江) 유역의 건주녀진(建州女眞)으로 나눈다."고 한 지식에서 그냥 우리는 한국사와 상관이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첫째, 오랑캐를 무찌를 군사들의 행동 목표 지명이 이오로(伊吾盧)이다. 이곳은 지금의 신강성 동부 이주(伊州)·이오현(伊吾縣)이라고도 하는데,《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보면, 지금의 신강성 합밀현(哈密縣)이다. 그 쪽 발음의 하미(哈密)는 천산산맥의 동쪽 끝 투르판[吐魯番)·류성(柳城: 柳中)의 동쪽, 돈황(敦煌)의 북쪽인 북위 42.8도 동경 93.5도이다. 한반도에서는 너무도 멀다.
일곱째, 병력의 이동소요 기간이 최소 16일간(전라도 일부)·17일간(강원도)에서 최대 39일간(전라도 일부 및 경상도)으로 평군 30일간 걸리는 거리였다. 이것은 전라도 무안·함평(16일간 소요)이 지리적으로 옥구·김제(35일간 소요)보다 상대적으로 이오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전자는 전라남도에 있고, 후자는 전라북도에 있어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남쪽 멀리에 있어 이런 내용은 한반도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군사동원의 목표지 "이오로"는 사막의 언저리에 있으며, 서북쪽엔 중가리아(Dzungaria) 분지가 있고, 서남쪽엔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인데, 정남 쪽엔 사주(沙州)·돈황(燉煌)이 있다.
(1) 연주·운주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이오로'의 북쪽에서 칼을 어루만진다.[唾手燕雲 鳴劍伊吾之北]
이렇게 "이오"에 관한 말이 딱 두 번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鳴劍伊吾"(명검이오)이다. 이것은 역시 "국방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나타낸 말인데, 직접적인 지명과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종이 말한 "憤於伊吾"[이오로에서 분풀이하다]는 바로 그 지명에 직접 말한 것이며, 그곳에 대한 조치였음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1491년[孝宗4] 8월 15일에 황제의 아우 우지(祐 )를 수왕(壽王)으로, 우팽(祐木亨)을 여왕(汝王)으로, 우순(祐橓)을 경왕(涇王)으로, 우추(祐樞)를 영왕(榮王)으로, 우개(祐楷)를 신왕(申王)으로 봉했다. … 12월 22일에 투르판[土魯番: 吐魯番]에서 합밀(哈密: 하미/이오로)과 금도장[金印]을 가지고 귀순하였다.[『明史』卷15 本紀15 孝宗]
이 1491년을 전후하여 황제가 누구에게도 제후로 봉하지 않았고, 어디에 반란이 일어났거나, 어디를 공격했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직 투르판 지역의 제후가 하미[哈密], 즉 이오로(伊吾盧)와 금도장[金印]을 가지고 와서 귀순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전투를 벌였으며, 항복하여 그 지역에 대한 지휘권을 도로 바친다는 뜻이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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