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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장량상 동정 마애비에 대하여 (전자책)

등록날짜 [ 2024년07월05일 21시39분 ]

남해 장량상 동정 마애비에 대하여
최두환 논문 (전자책) / 한국문학방송 刊 


  남해왜성南海倭城 아래 바닷가에는 바위에 직사각형 비석 모양으로 파서 글을 새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장량상 동정마애비’가 있는데, 이를 “남해 만세덕동정마애비”라고 하지만, 명칭을 2018년 12월 20일에 “남해 장량상 동정마애비”로 바꾸었다.
  제목이 “東征詩동정시”라 새겨진 큰 바위가 2003년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30m 정도 미끄러져 내려왔다는 바위는 자연석이며, 둥글며 무척 크고 둘레가 20m나 되고, 높이는 5m이다. 그 앞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가로 1.5m, 세로 2.5m, 깊이 5㎝로 깎아낸 바탕에 17줄 374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출처는 『고운당필기』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고, 이 비문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의뢰받아 조사했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처음으로 1922년에 탁본했다.
  비문의 글자는 현재 남해 선소마을의 <동정시>와 『금석총람』의 <장량상동정시비>와는 서로 거의 같으나, 『고운당필기』의 <진도독비>는 잘못되거나 다른 글자가 15곳이나 서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판독이 어려운 글자의 원문을 알아보기에는 가장 확실한 사료이다. 선소마을의 <동정시>가 비문대로 1599년(만력27)에 쓰인 것인지, 『조선금석총람』에 실린 1919년(대정8)이 먼저인지, 그 제목에서 보면, 호남의 해남현에 있었다고 밝힌 『고운당필기』의 글이 더 오래된 글이며, 그 제목도 <진도독비>가 원형이고, 이것은 1795년[을묘]에 비문의 글 제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고운당필기』 속의 “庶揚有赫之威云” 등을 조선총독부의 『금석총람』에서 “庶揚有截□□云”의 ‘截’로 몇 자씩 바꾸고, 제목 <明張良相東征詩碑>를 줄여서 다시 새기기에 쉽도록 <東征詩>로 바꾼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올바른 본디 제목은 <진도독비>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비문의 제작 순서는 <진도독비><장량상동정시비><동정시>의 순이 되므로, 이 <동정시> 비는 1919년 직전에 새겨진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고운당필기』에 “1795년 가을에 왕명을 받들어 『리충무공전서』를 편찬하다가 이 시를 보았다”라고 했으니, <진도독비>가 처음 전라도 해남현에 있었다가 어디로 옮겨진 것인데, 그것이 경상도 남해군 선소마을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동정마애비> 바위가 옮겨 가져올 수 있는 비석[碑]이 아니고, 무척 큰 바위로서 사람의 힘으로 땅 위에 세울 수 있는[建] 것도 아니며, 단지 깎아 글을 새겼기[刻] 때문이다. 정작 『리충무공전서』에서는 “청산도靑山島 진도독비문陳都督碑文”을 보았다고 했으니, 일단 “청산도에 ‘진도독비’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있는 작은 섬이며, 『고운당필기』에 나온 ‘해남현’이 아니라, ‘완도군’이기 때문에 같은 호남 전라남도이기는 하지만, 아주 서로 다른 곳이다.
  비문을 요약하면, 조선에 또 왜변이 일어난 것이 1598년 늦가을이며,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이다. 그런데 왜란이 일어나고 동정군을 보낸 지 예닐곱 해가 지나 오래되었으나 승전보고가 없었기에 천자가 화를 크게 내었고, 동정군을 다시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동정군에는 만세덕·형개·진린 등이며, 여기에 여러 사료에서 보면 장량상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에서 진린이 영웅스런 풍모가 있어 충성스러운 꾀를 다하였으며, 부산에서 동정군의 위엄을 크게 보여 왜적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이러한 공적으로서 천자의 위엄을 먼 지방에까지 알려서 후손에게 밝힌다는 것이며, 황제의 위엄을 떨쳐 반역자를 물리친 공을 시 두 편으로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놓친 것은 동정군의 활약에 요약된 ‘부산에서 동정군의 위엄’을 보인 것을 빼고는 정작 가장 큰 공적이 있는 노량해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들 명군의 활동도 언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연합군에 대한 언급조차도 없다.
  그래서 현재 명칭 “남해 장량상 동정 마애비”는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을 따 〈장량상 동정마애비〉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고운당필기』에 적힌 대로 “진도독비”라거나, “진린 도독비”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임진왜란에서 동정군의 참전으로 조명합군은 모두 61곳 63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였으며, 특히 도독 진린陳璘은 수군 도독으로 군선 500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파견되어 삼도수군통제사 리순신과 함께 노량에서 왜적을 쳐부수었다. 이렇게 조명연합군은 16곳 18회의 전투를 하여 16승 6패를 하였는데, 특히 4곳 4회, 곧 절이도·예교성[광주양]·묘도·노량 해전이 있었고, 다만 장도·예교성의 광주양 해전에서 동정군의 진린이 거느린 전함이 39척이나 좌초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리순신은 패한 적이 없어 불패와 무패의 전설을 남겼다. 이러한 전과의 전쟁사는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그래서 <진도독비>가 어디에 있든, 함께 작전한 명군 지휘관 진린이 리순신더러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란 말처럼 그 큰 업적을 과시하며 비문에 새겨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초록>  


              - 차    례 -   

<초록> 

Ⅰ.  머리말 

Ⅱ.  마애비문磨崖碑文과 그 진실  

   東征詩  
   陳都督碑  
   二三四南海 明張良相東征詩碑  
   <진도독비>의 존재에 대하여 

Ⅲ.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에 대하여  
   1. 명군의 파병 시기에 대하여  
   2. 명군의 전투활동에 대하여  
     1) 절이도折爾島 해전  
     2) 광주양光洲洋 해전  
     3) 묘도猫島 해전  
     4) 노량露梁 해전 
  3. 명군의 철수 시기에 대하여 

Ⅳ.  갈무리  

참고문헌 
Abstract 



[2024.07.01 발행. 179쪽. 정가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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