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특강 / 나의 문학 나의 인생 / 정종명]
"시골 초동에서 서울 문단까지"
1. 이야기책과 아버지
■ 이야기책과 뒤마의 <삼총사>
나는 초등학교 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6․25전쟁 직후였는데, 밤이면 호롱불을 켜야 하는 벽촌이었습니다.
지금도 참 신비롭게 여기지만, 우리 아버지가 좀 유별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알기로 소학교를 2년인가 다니고, 서당에 조금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우리 마을은 물론이고, 근동에서 손꼽히는 유지로 통했습니다.
그 무렵의 시골에는 문맹자가 태반이었습니다. 입대한 아들이 편지를 보내 와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편지를 대신 읽어 주었고, 또 답장을 대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대가로 아버지는 종종 내성 장에 나가서 술대접을 받았습니다. 술이 좀 거나해진 날이면 아버지는 여지없이 조상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요즘 방영되는 KBS 주말 드라마 아시지요? 아버지는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아주 대단한 분입니다. 족보를 보물단지로 여기시고, 문중 시제에는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긴긴 겨울밤이면 사랑방으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사람을 전기수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물론 전문 전기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는 이야기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어 주는 목청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읽어 주는 이야기책은 주로 내성 장에 가서 사 오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이야기책으로는 <춘향전>이나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책을 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슬픈 대목에 이르게 되면 아버지는 아주 처량한 목청으로 책을 읽어 나갔고, 여자들은 소맷부리로 눈시울을 훔치면서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어린 나도 가슴이 뛰면서 저절로 눈시울이 더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가슴을 뛰게도 하고 눈시울을 붉어지게도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마을 사랑방에서 색다른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내성 장에 가서 사 오는 이야기책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습니다. 글자 모양도 그랬고, 지질(紙質)도 현저하게 다른 책이었습니다. 마을 청년들이 잎담배를 말아 피우는 바람에 앞부분과 뒷부분의 책장이 여남은 장씩 뜯겨져 나간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집어들고 뒤적거리다가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읽어 본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프랑스 작가 알렉산더 뒤마가 쓴 <삼총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중학교에 진학한 다음이었습니다.
■ 글재주로 세상 사람 속이지 마라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 년 뒤에 우리 집은 강원도 황지로 이사를 했습니다. 요즘은 태백시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황지에 있는 대성탄좌 소장으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태백시는 온 사방이 석탄 가루로 까맣게 뒤덮인 탄광촌이었습니다. 산도 까맣고, 지붕도 까맣고, 길거리도 까맣고, 심지어는 흐르는 물도 까만 검정물이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새카만 얼굴이었습니다.
황지에서 시오 리 길인 장성 소재 태백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주로 버스로 통학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자전거 통학도 했고, 또 한동안은 학교 부근에 하숙도 하면서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학원>이란 학생 잡지를 접하게 된 것은 이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시를 써서 <학원>에 보냈는데, 두어 달 뒤에, 작품은 실리지 않고, 가작 난에 ‘태백중학교 2학년 정종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유명 잡지에 실리는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을 얻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태백시 인근에는 태백공고밖에 없었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광업소에 취직이 되어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런 광업소에 들어가 채탄부로 종사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셨습니다. 명색이 삼봉 정도전의 후손이 탄 캐는 일에 평생을 바칠 수는 없다고 판단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진학한 학교가 강릉고등학교였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강릉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가 소설가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 시인 원영동 선생님이 국어 교사로 재직하셨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최초로 만난 시인이었습니다. 나는 그 선생님의 눈에 띄어 문예반에 들어갔고, <학원>에 투고해서 시나 소설이 실리기도 했고, 각종 문예콩쿨대회에 출품해서 입상도 했습니다. 나는 영어나 수학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현대문학>이나 세계명작을 탐독하는 문학병에 멍들고 말았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나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 당시 인기가 좋았던 한양공대를 나와 큰 기업체에 기술자로 취직을 해서 월급 많이 받는 회사원이 되기를 원했고, 나는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나를 불러 무릎 앞에 앉혀놓고 물었습니다. “저기 다리 밑에 가면 밥 얻어먹는 거지 봤제?”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마을 어귀에 거지들이 떼를 지어 살았습니다. “네.”하고 대답하니까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작가란 말이다. 그 거지들하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잘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겨우 승낙을 받아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서 나는 소망하던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시쳇말로 ‘아들 바보’입니다. 아들 바보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 아시지요? 아버지는 “내 아들 정 아무개가 소설가다.” 그런 식으로 ‘아들 자랑’이 너무 심했습니다. 언필칭 팔불출이랄까요. 당신 생각에는 흠모해 마지않는 ‘삼봉 정도전’의 후손이 소설가가 되었으니 더 더욱 자랑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하는 저로서는 민망하고 낯간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소설가가 되고 나서 아버지께서 내리신 엄명을 저로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면 글 잘 짓는 문장가들이 주로 높은 벼슬을 했다. 그런데 개중에는 아주 사악한 글로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사화(士禍)를 일으킨 문장가가 한둘이 아니더라. 뭐니뭐니해도 문장가는 정직해야 한다. 하찮은 글재주로 세상 사람을 속이는 다라운 짓은 하지 마라.”
대학 진학 당시 아버지께서 왜 하필이면 거지 이야기를 내게 해 주셨는지 한 번도 여쭤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거지는 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이다. 작가는 그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의 빛을 불어넣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글재주로 세상 사람을 속이는 ‘다라운 짓’은 하지 말라던 당부의 말씀도 저는 늘 명심했습니다.
2. 내 작품의 뒤안길
■ 등단 직후 작가동인 참여
나는 1978년 10월에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사자의 춤’이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그 무렵은 요즘과 달라서 거리에 서점이 참 많았습니다. 걷거나 버스를 타고 서점 앞을 지나갈 때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서점 진열대에 내 작품이 실린 <월간문학>이 놓여 있을 것이고, 많은 독자와 문예지 편집자가 그 작품을 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자는 내게 잘 읽었다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낼 것이고, 문예지 편집자는 나한테 원고청탁서를 보낼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환상에 빠진 그 한 달 내내 나는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달콤한 행복감은 오래잖아 쓰디쓴 좌절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내게 편지를 보내오는 독자도 없었고, 원고청탁서도 물론 없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육 개월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기다리는 원고청탁서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냉엄한 문단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원고청탁서 한 장 못 받는 작가, 작품을 열심히 써 보았자 발표할 지면도 없는 작가,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무늬가 달라집니다.
등단하고 나서 2년인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나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김채원, 손영목, 서동훈, 김원우, 유익서, 유홍종, 표성흠 등 쟁쟁한 신인작가들을 만나 ‘작가동인’을 결성했고, 1980년에 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작가동인> 1집을 내었습니다. <작가동인> 4집을 내기까지 강석경, 김상렬, 김인배, 정소성, 최학, 황충상 등도 이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다 대가급으로 성장한 중견작가들이라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만, 이들과 어울려 지낸 덕분에 나도 덩달아 ‘좀 쓰는 젊은 작가’로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내 작품의 키 워드
나는 널리 알려진 인기작가가 아닙니다. 내 작품을 읽고 내용을 기억해 주는 독자가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의 어떤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고마운 독자를 만나기보다는 “무슨 작품을 쓰셨지요?” “제목이 뭐지요?”하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되는 배경도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과연 무슨 작품을 쓴 작가인가? 이런 생각이 들거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나는 등단작인 <사자의 춤>을 비롯하여 단편소설 <이명>, 중편소설 <숨은 사랑>, 장편소설 <거인>을 예로 들면서 내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키 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 등단작 <사자의 춤>
나의 등단작은 앞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사자의 춤』입니다. ‘처남이 죽었다.’하고 시작되는 이 작품의 서두를 놓고 나는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까뮈의 『이방인』을 모방했다는 오해를 살 우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작품 『사자의 춤』도 까뮈의 『이방인』처럼 일인칭 소설이고, 실제로 그 무렵 까뮈는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춤』과 『이방인』은 분위기가 전혀 다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주제도 물론 다릅니다. 나는 서두를 여러 번 고쳐 쓰다가 결국은 ‘처남이 죽었다.’는 첫 줄을 지워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첫 줄을 삭제하면 도입부가 어쩐지 엉성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어느 자리에서 문학평론가 권영민 씨는 이렇게 진단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 작품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군소리를 늘어놓는 쑥스러움을 모면해 볼 방편으로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자의 춤』은 인간관계의 특이한 양상을 추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집을 뛰쳐나가 버린 아내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처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가집에 찾아가게 된다. 처남의 장례식에 아내가 다른 사내와 함께 나타난다. 병을 얻어 세상을 일찍 떠난 처남을 위해 집안에서 벌이는 무당굿에서 주인공은 신장대를 잡는다. 소설의 끝 장면은 신장대를 잡고 있던 주인공에게 혼백이 내려 예기치 못했던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은 아내와 함께 나타난 사내에게 주인공이 구타를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과 아내의 인간관계가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사자의 춤』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요건이 되고 있는 신뢰와 사랑의 결여 상태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 정종명은 자기 풍자의 방법으로 그런 현상에 접근하고 있다.
사람이 죽고 나서 무당을 불러 하는 굿을 진오귀굿이라고 합니다. 집가심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이나 판수를 시켜, 악기(惡氣)를 깨끗이 물리치기 위해 굿을 합니다. 나는 직접 진오귀굿을 본 적은 없습니다. 처남이 마흔아홉 살에 죽었을 때, 그 장례식에 참석하고 뒤늦게 돌아온 아내가 “무당이 초상집에 와서 굿을 했어요.”하고 다소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빛 같은 것을 감지했습니다. 작품이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 모델도 있고 해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 중편소설 <숨은 사랑>
「숨은 사랑」은 200자 원고지로 330장 정도 되는 중편소설입니다. 1989년 4월에 문예지 <현대문학>에 발표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인은 죽어 별이 된다>는 제목으로 작품을 써 나갔으나 탈고할 무렵에 <숨은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이명재(李明宰) 씨가 요약한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노시인 가르시아는 뜻밖에 실권자로 섭정하고 있는 노리에이 장군의 사저인 비토리오성의 비서실장 아르세모의 전화를 받고 그곳에 초대된다. 노리에이 장군은 쿠데타로 집권하여 25년간 통치해 오다가 국민의 압력과 저항에 굴복하여 2년 전에 심복인 마웅사우를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는 위인. 그는 가르시아가 펴낸 시집을 즐겨 읽었고, 특히 지난 주에 그가 쓴 신문칼럼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 날도 수도 사울로는 현재 위수령이 내려져 있는 부마사이와 카이주아시의 학생 소요 못지않게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다. 이런 혼란기에 즈음하여 떼강도와 인신매매단이 판을 치고, 전국 도처의 공장에서는 노사분쟁이 발생한다.
가르시아는 여제자인 테레사 교수에게 들렀다가 밤이 늦어 귀가한다. 그 사이에 피플모닝지에 발표한 그의 신문칼럼과 노리에이 장군을 방문한 그를 항의하기 위해 제자들이 다녀가고, 이튿날 친위 쿠데타가 일어난다. 재야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 사기극이었다. 이로 인해 카이주아시 일원에 시민까지 합세한 극렬시위가 발생하는데, 여기에 가르시아 시인의 손자인 도이미나가 가담한다. 이에 아들을 찾아나선 모이구지 교수는 오히려 데모에 가담한 것으로 혐의를 받아 투옥된다. 가르시아는 아들과 손자를 구출하기 위해 카이주아 교도소를 방문하지만 갖은 수모만 당할 뿐이다.
이 와중에 며느리는 병원에서 유산을 한다. 가르시아가 그 며느리를 문병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경찰관이었다. 가르시아는 경찰서에 끌려가 거기에 나타난 아르세모로부터 국민을 위무할 수 있는 신문칼럼을 다시 쓸 것을 강요받는다. 거절하면 가르시아가 테레사와 맺은 불륜관계를 폭로해 버리겠다는 위협을 곁들인 강요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절박한 국면에 처한 가르시아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을 기도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역명이 특이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개재합니다. 군사 독재는 우리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미얀마가 그러했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지역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는 그 어디에서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국민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도 그러했고,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 역시 군사 독재자의 핍박에서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러니까 우리의 지난 역사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우리와 비슷한 형태의 정치현실을 가진 여러 나라의 모습을 보다 포괄적으로 그려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있었습니다. 지극히 남미(南美)적인 이름이나 지역명은 거기서 비롯되었지만, 지역명에 국한해서는 해설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울로는 서울, 부마사이는 부산과 마산, 카이주아는 광주, 하이나강은 한강, 서이나미는 성남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이런 식의 비유성을 가미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한국적인 정서에 머물고, 또 자칫하면 다친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이 동인문학상 후보작으로 올랐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하근찬(河瑾燦) 선생님은 ‘이 소설은 어느 모로 보나 해학적인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공포적인 요소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웃음이 나온 것은 작품의 무대로 설정한 남국의 어느 가상 국가와 우리의 지나간 한 시대의 단면이 오버랩되는 데서 오는 해학성과, 고유명사들이 보여 주는 익살기 때문이다. 읽고 난 뒤에 강한 인상으로 남는 작품이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1989년 1월 1일에 쓴 일기를 보면 ‘현재 130매 정도 나갔으나 정확한 매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최소 200매는 넘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강한 의욕을 느껴 본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예감은 대충 맞아 떨어져서 발표 직후 여러 지면에서 화제작으로 다루어 주었고, 동인문학상 외에도 김유정문학상․현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 후보작으로 거론되었습니다.
■ 단편소설 <이명>과 장편소설 <거인>
단편소설 <이명>은 1983년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 신문마다 ‘월평’ 난이 있었는데 여러 신문에서 우수작으로 다루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내 이름이 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희생당하는 소외 인물을 그려 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단편소설 <이명>
하기석은 대학시절에 데모꾼으로 낙인이 찍혔고, 전 직장에서는 노동쟁의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파면당한다.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 하기석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유림산업 사장인 친구를 만나 그 회사의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그런데 그 회사 나름의 서열을 깨뜨리면서까지 사장은 하기석을 부장으로 승진시킨다. 이 인사발령의 후유증은 심각한 양상으로 불거진다. 부장으로 승진되어야 마땅한 서운배를 비롯해 대부분의 고참 사원들이 하기석의 벼락승진에 불만을 표시한다. 하기석은 술자리에서 이석진과 육탄전을 벌이고, 부서의 직원들은 집단 결근을 감행한다.
하기석은 이런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면서 사직서를 제출한다. 사장이 다시 불러 주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아무 연락이 없다. 이 모든 사태의 전말이 사실은 사장의 교묘한 연출이었다. 하기석이 안양공장 근로자들과 몰래 어울린다는 사실을 포착한 사장이 고도의 술수를 부려 그를 퇴직시킨 것이다. 제목의 <이명>(耳鳴)은 하기석이 느끼는 강박관념 혹은 피해심리를 암시하고 있다.
▶ 장편소설 <거인>
장편소설 <거인>은 1985년 5월호부터 이듬해 4월호까지 문예지 <소설문학>에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연재가 끝나고 이승훈 시인의 추천으로 도서출판 고려원에서 <인간의 숲>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거인>이란 제목이 너무 무거워 팔릴 것 같지 않다는 출판사 측의 강력한 권유로 제목이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MBC 미니시리즈 8부작으로 방영되었을 때는 도로 <거인>이란 제목으로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1987년 2월에 동아출판사에서 펴낸 ‘우리시대 우리작가’ 문학전집 27권에도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에 대해 나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깊은 애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면 개작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3. 준비하면 기회는 찾아온다
■ 영남일보 연재소설
IMF 직후였습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바람에 실직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신문은 연재소설을 없애 버렸고, 출판사는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직장 없는 전업작가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나 하는 점은 짐작이 가실 줄로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밖에 할 일이 따로 없었기도 했지만, 그러나 내심으로는 혹시 어디서 연재소설을 쓰라고 하면 당장 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갈보리 교회 박조준 목사님께서 그런 설교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준비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 문화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연재소설을 청탁했습니다. 고료는 얼마나 주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쓸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담당 기자의 말이, 날짜가 너무 촉박한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그래요. 내가 전화를 받은 것이 1999년 2월 18일 저녁 8시쯤이었는데, 3월 1일자부터 연재소설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연재소설을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절차상 대단히 급박한 사태에 속합니다. 2월은 더구나 28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삽화 그릴 화가와 만나 사진도 함께 찍어야 하고, ‘작가의 말’도 써 보내야 하고, 그러면서 적어도 3, 4회 정도의 연재소설도 먼저 보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평소에 아무 준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쓰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했다 하더라도 아마 그 연재소설을 못 쓰지 않았을까요. 평소에 준비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연재가 가능했습니다. IMF 시절에 월 300만원씩 받으면서 1년 동안 연재를 했으니, 그런 행운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대학 강단에 서서
또 이런 예도 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기로 마음먹고 석사 학위를 거쳐 박사 학위를 마친 사람은 예외입니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오로지 창작 생활을 쭉 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된 문인들이 90년대 들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우리 문단에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같은 분들이 학사 학위도 없이 대학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친 그런 원로문인들은 예외에 속합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강의한 이청준 작가가 가장 먼저 박사 학위 없이 교수로 임용되는 특례를 받았던 사람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이문열, 한수산, 윤흥길, 박범신, 이문구 제씨들이 차례로 교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의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물론 그들처럼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그들처럼 좋은 작품을 세상에 보여 준 적도 없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면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했으니까요. 그러나 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 못지않게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에 사로잡혔지요. 그래서 만약 어느 날 어느 대학에서 나보고 “당신 우리 학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소설 쓰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시오.”하고 요청한다면 그 즉시 강의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서점에 나가서 소설작법과 관련된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샀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의 장단점을 세세히 파헤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강의안을 나름대로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설령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강의 준비를 해두면 나중에 문화센터에 나가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 기회마저 오지 않는다면 책으로 펴낼 수도 있으니까 그리 허망한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내게 그 꿈같은 일이 실제로 찾아왔습니다.
나를 대학 강단에 서게 한 사람은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이재인 교수였습니다. 원래 수필가로 출발한 사람이지만, 1980년대 중반에 <악어새>란 장편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라 문명을 날리기도 했던 이 분이 어느 날 나한테 전화를 걸어, “요즘 어떻게 지내요? 우리 대학에 와서 강의 좀 해요.” 그러는 거예요.
나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9년 동안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 수필, 아동문학 등을 강의했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숭실사이버대학교 한국어문화예술학과에서 소설작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나다니엘 호돈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미국 작가인데, <주홍글씨>로 문명을 떨친 작가이지요. 이 사람이 쓴 <위대한 돌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큰 바위 얼굴>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으면 그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4. 나의 문단정치 이야기
■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에서
2004년 초가을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박제천 시인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때 그와 나는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대우교수로 함께 강의를 하는 비교적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문효치 시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문효치 시인과 처음으로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는 부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갔습니다. 나를 불러낸 박제천 시인이 그러더군요. “여기 문효치 시인이 이번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선거에 출마해. 정 형이 부이사장으로 동반(러닝메이트) 출마해 주면 좋겠어.” 박제천 시인과 문효치 시인은 동국대학교 국문과 동문이면서 막역한 친구 사이입니다.
나로서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심 밖의 사안이었습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말로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내심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며칠 뒤에 문효치 시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전에 했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박제천 시인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습니다. “펜 선거에 동반 출마하기로 정 형이 약속했지.”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지 않았던가요?”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약속했어.” 아마 취중에 그만 약속을 해버린 모양입니다.
나는 문효치 시인과 러닝메이트가 되어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단선거에 입후보했고, 부이사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당시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은 김종상 아동문학가, 이수화 시인, 이길원 시인, 김학 수필가, 그리고 나를 포함해 5명이었습니다.
이사장단 회의가 처음으로 열린 자리에 모 씨가 나타나 자기가 책임을 질 터이니 충남 지역의 문인 셋을 거명하며 무조건 제명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세 문인이 국제PEN한국본부를 비방하고 다닌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실 확인과 절차도 없이 제명 처분부터 내리라니, 이 기이하고도 황당한 겁박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와 목소리를 높여 언쟁을 벌였고, 그 충돌이 빌미가 되어 한국문인협회로 무대를 옮겨서도 그와 나는 서로 외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으로 2년 동안 재임했고, 2007년 2월에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편집국장 부임을 계기로 그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박제천 시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문효치 시인과 맺은 인연이 종국에는 내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 되는 시발점이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까지
나와 김년균 시인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동기동창입니다. 2006년 12월, 그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에 출마했을 당시, 나는 경기대학교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마침 겨울방학 중이었습니다. 40년 지기가 이사장으로 출마했는데, 나 몰라라 외면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그는 이사장에 당선되었고, 나를 <월간문학> 편집국장으로 초빙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의 요청을 사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가까운 사이라서 그의 장도에 혹 장애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이사장으로서 나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월간문학> 편집만이라도 편집국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정 형이 적임자다.”
나는 1975년 5월에 <현대문학>에 입사해서 5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1984년에 <소설문학>에서 일 년 동안 근무했고, 이어서 1986년 6월부터 2년 6개월 동안 미당 서정주 선생님께서 창간하신 <문학정신> 편집장으로 근무했습니다. 30대 혈기 왕성한 시절을 문학지 편집으로 보낸 셈입니다. 김년균 이사장은 나의 그런 전력을 높이 샀고, 나도 사실은 문학지 편집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상 생략)――
나는 평소에 <월간문학>이 한국문인협회 얼굴이라는 사실, 원로회원에서 신입회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좋은 작품을 받아 실어야 한다는 점, 많은 문예지 가운데서 회원들이 작품을 꼭 싣고 싶은 품격 높은 문예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역점을 두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다. 그러한 생각과 태도는 <월간문학> 자매지인 <계절문학> 편집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월간문학>에 싣는 작품은 크게 청탁과 기고로 이루어진다. 청탁의 경우, 원로회원에서 신입회원까지 나름대로 발표의 기회 균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청탁과 관계없이 보내오는 기고 작품도 적지 않은 편인데, 일단 작품을 보내오면 나는 기고자가 예측할 수 있도록 게재 시기를 명시한 답메일이나 편지를 보내 주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썼다. 작품을 받고도 받았다는 연락 한 마디 없고, 게재될 때까지 부지하세월로 기다려야 하는 기고자의 초조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오만한 편집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간문학> 편집자는 누리거나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마땅히 정성을 다해 회원들을 섬기는 자리여야 하며, 그러한 자세는 회원들에 대한 기본 예의이자, 편집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하 생략)――
위의 인용문은 <월간문학> 500호에 실려 있는 나의 회고담입니다. <월간문학> 편집 책임자로서 내가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자세로 일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옮겨 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한국문인협회 제25대 임원선거에서 이사장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을 든다면 아마도 <월간문학>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보여 준 나의 직무 수행 자세를 많은 문인이 높이 인정해 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위야 어쨌든 지난 3년 동안 많은 회원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사장 임기가 끝나면 서재로 돌아가 그 동안 쓰지 못했던, 꼭 해 보고 싶었고 마땅히 해야 할, 열정적으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인생을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는데, 이 나이에 그게 가능할는지는 의문입니다. (201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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