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칼럼]
아무도 모른다
어느 사이에 70줄 후반에 올라섰다. 나의 인생에 이렇다 할 공적도 없으니 인생무상의 나락에 빠져, 나의 존재가 초라함을 느낀다.
그동안 심리학 강의와 관련된 졸저를 통해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 삶의 길을 설파하려 했었다. 또, 문학 소설가로서의 작품을 통해, 인생 삶의 가치를 제고시키는 활동도 해오고 있지만, 아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도 못했으니 성공했다고 볼 수도 없다. 더더욱 이러한 판단 자체도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 내 삶에 숨겨있는 오류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행복을 가지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러할 권리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의무까지 있다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그 동안 인간의 참된 행복을 올바르게 추구하며 저술하고 강의 하고 실천해 왔었던가? 깊이 통찰 해보고 싶다.
"에리히 프롬" 에 의하면 인간의 생존양식을 다음같이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소유(所有)중심의 삶이요, 또 다른 하나는 존재(存在)중심의 삶이다.
소유 중심의 삶은 재산이나 지식. 지위 및 권력을 추구 하는 등의 자기 소유에 전념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소유 자체를 자신의 존재로 여기고, 따라서 가진 것을 잃을까 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이해관계로 보기 때문에, 방어적이고 가혹 적이며 외로워짐으로서 행복과는 멀리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
성서의 말씀과 같이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고, 식사를 베풀 때에는 좋아하는 친구와 부유한 이웃과 지인만을, 또한 지위. 권력. 경제적인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만을 초대한다. 결국 자기를 과시하려고 함으로서 불행과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반면에, 존재 중심의 삶은 나눔과 베품을 가치로 여기는 삶이라고 한다.
즉, 베푸는 삶, 더불어 사는 삶, 봉사하는 삶 그리고 이해하는 삶을 가짐으로서 참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의 말씀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자신을 낮추기를,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함으로서 최후에는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보답 받는 참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유형의 생존양식에 속해 왔을까?
소유 중심의 삶일까? 아니면 존재중심의 삶일까?
아무래도 여기와 저기에 모두 해당되는 어정쩡한 사람일 것 같다.
마음과 생각으로는 그리고 강의와 저술로는 존재중심으로 나아갔지만, 소유 중심의 삶이 끼어들어 독차지하는, 혼탁 된 삶임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 속에 빠져있는 마음이다.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으라, 그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성서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아닐까?
□ 큰길 김진수
소설가.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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