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연재소설 『파란색 물개』 / 김산 作
제1화 <한복입은 女子> (제3회)
백천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직접 실천을 했다.
칠억이 넘게 입금되어 있는 통장을 라면 먹고 이빨 쑤시는 기분으로 내밀었다. 그냥 주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돈은 네 돈이니까 지져 먹든, 볶아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며 손바닥을 탈탈 털어 버렸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애비 좋고 자식 좋은 격이 되어 버렸으니 백천길은 집 걱정 할 것이 없었다. 칠억 몇 천만 원을 종자돈 삼아 더 큰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상경을 했다.
돈도 써 본 놈이 쓸 줄 알고, 여자도 꼬셔 본 놈이 꼬실 줄 아는 법이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던 사람은 돈 천만 원이 생기면 저축을 하고. 룸살롱 스타일은 텐 프로 아가씨 불러서 여행 간다.
백천길은 재벌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칠 억을 십억으로 불리고, 십억을 백억으로 불려서 천 억대 갑부가 되고 결국 재벌이 되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불광동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까 배가 고팠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짜장면 곱빼기를 먹느냐, 짬뽕을 먹느냐. 고민을 하다 통장에 칠억이 넘는 돈이 들어 있다는 자존감에 비싼 설렁탕을 먹었다.
설렁탕에 국수를 추가해서 먹고 나니까 배가 불렀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야 하지만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설렁탕집에 턱 버티고 써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단 서울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관망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백천길은 대전에 있는 전문대학을 나와서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낯선 곳이다. 일산에서 시외버스 타고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다 보니, 불광동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의 지리는 익숙하다. 좀 더 원정을 가면 신촌에 있는 대흥극장 가서 동시상영 보고 감자탕에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 때는 어디까지나 놀러 왔을 때고 서울사람이 되려면 뭔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며칠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백천길은 그래도 명색이 칠억 대 부자니까 최소한 여관에서 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러면 돈이 필요하다. 은행에 가서 청구서에 십만 원정 이라고 멋지게 써서 창구에 내 밀었다.
그 시절은 은행업무가 지금처럼 온라인화가 되지 않던 때다. 이제 막 온라인을 도입해서 예금업무와 당좌 업무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던 시절이다. 창구 여행원은 백천길의 잔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눈을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동그라미를 헤아려 봤다. 분명히 동그라미가 8개다.
여행원은 뒤에 앉아 있는 대리에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담당 대리는 이 여자가 대낮에 유부남한테 사랑 고백하나 하고 마른 침을 삼키다가 깜짝 놀랐다.
예금 담당 대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창구 앞으로 갔다.
“이, 이 돈이 무슨 도, 돈입니까?”
대리는 백천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나서 통장을 펼쳐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천길은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가 일산 땅 보상금을 받은 돈이라고 말했다.
백천길은 지금도 그날 있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대리는 일단 백천길을 안으로 모셨다. 백천길은 은행은 가끔 이용했지만 뱅크대 뒤 쪽, 그러니까 은행원들이 사무를 보는 쪽으로 들어 가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지점장실은 맹세코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은행은 삽시간에 비상이 걸렸다. 차장의 보고를 받은 지점장은 여신한도를 다고 본점에 출장 중이다. 여신부 직원이 내미는 전화를 받고 콜택시 운전사에게 따따불 요금을 주고 총알처럼 달렸다.
지점장은 맹꽁이배를 흔들며 헐레벌떡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앳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백천길의 사정을 자세히 들은 지점장은 백천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뜨거운 침을 꿀꺽 삼키며 예금을 우리 지점으로 옮겨 달라고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살려면 서울은행에 입금을 해야 한다. 입금을 해 주시면 VIP고객으로 모시겠다. 서울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집안 아저씨라고 생각하며 언제든 부탁을 하라. 얼굴도 참 잘 생겼는데 장가 갈 생각이 있느냐? 은행원 중에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아가씨가 있는데 소개 해 줄 수가 있다. 나는 한번 맺은 인연은 죽을 때 까지 갖고 가는 사람이다. 라며 백천길의 감성을 자극했다.
“어떡하면 되는데요?”
백천길은 지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서울은행에 입금을 하는 것이 좋다는 말만 들렸다.
은행대리며 지점장이 깜짝 놀랄 정도로 통장을 꺼내서 응접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 놓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청구서를 써 왔습니다.”
예금당당 대리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얼른 청구서를 내 밀었다. 청구서에는 통장의 잔고가 적혀 있었다.
“여기다 도장 찍으면 됩니까?”
백천길은 이름을 쓰고 도장을 꾹 눌러 줬다.
“감사합니다. 일단 일 년 정기예금으로 해 놓겠습니다.”
“그럼 일 년 있다가 찾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예, 이율이 제일 높은 15%입니다.”
“전, 사업을 해야 합니다.”
백천길이 도장을 휴지로 문질러 닦으며 지점장을 바라봤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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