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환 칼럼]
하멜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 하멜 표류기 다시 읽을 용기 있는가?
350년 전에 조선에 왔던 역사 ‘하멜 표류기’!
누구나 들어왔던 제목이요, 오래 전부터 간단한 소개 수준정도로만 알았던《하멜 표류기》를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속의 몇 가지를 확인하면서, 지금처럼 흥분된 마음을 겨우겨우 거누며 추스러 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흥분의 시작은 2002년 봄, 번역된 글에서 몇 가지의 낱말과 구절을 원문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부터였다. 영어 번역문으로써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것이 있어 네덜란드어 원문의 확인이 필요했고, 나는 비록 늦깎이이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도서관을 자주 들러 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로 된 경인문화사의 영인본《하멜 표류기》를 찾아내어, 번역된 용어가 적절한가를 비교해보았다.
번역서들에 대한 약간의 실망과 원문 속에서의 많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 흥분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네덜란드 원문《하멜 표류기》를 번역해야 하겠다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그 중요한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뒷전으로 내팽개친 채, 네덜란드어 공부의 시작이면서 원문 번역‧해설이라는 엉뚱한 욕심에 사로잡혔다.
세계를 식민지정책으로 부국(富國)의 길로 경영(經營)해보려는 유럽인의 숨은 의지를 찾아내는 연구도 중요하다. 또 외국어로 쓰인 역사(歷史)를 이면사(裏面史)가 아닌, 진실(眞實)의 정체(正體)를 재조명하는 과정은 더욱 중요하다.
이런 값진 학문의 중심에 우리의 조선(朝鮮: Coree)이 있고, 그 속에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결론은 이《하멜 표류기》의 진실이 조선의 실체를 말해주며, 그 실체란 하멜 일행이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는 것과 그들은 지금의 중국대륙 자체에서 13년 28일간(1653. 8.16~1666. 9.14)을 보냈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조선이 중국대륙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학습할 참고문헌부터 부랴부랴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겨우 보름만에 모두 구하여 주말이 되면 밤샘하면서 밤을 낮 삼아 연구에 몰두했다.
물론 영어 번역문이 많은 참고가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하멜이 조선 땅(중국이라고 단언함)에 체류했음을 입증하는 언어들이 청천벽력처럼 마구 쏟아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대 및 아열대 동식물의 이름 — 악어(crocodile)‧야자술(arrack)‧파인애플(vuijre boomen)‧코르크나무(korck)‧소목(sappanhout) 등과, 중국 남부지방의 언어 — 까띠(cattij)‧따일(taijl) 등과 더불어, 중국의 서남부 인도와의 경계지역의 화폐인 까시(kassie)라든지, 일본말 — 벤유센(benjoesen)‧사께(sake)‧남빤꾹(Nampancoeck) 등의 등장이다. 그 밖에 많은 식용 과일(vruchtbaer van leeftocht)과 풍성한 말떼‧소떼(overvloet van paarden en koebeesten)와, 말들 및 소들이 떼지어 다닌다(sijder met meenighte)란 말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넘쳐난다(dog alles in overvloet)고 한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구가 매우 많다‧조밀하다(seer volckrijck)는 등의 표현이 있으며, 지명이 지금의 중국식 발음인 Tadjang(大田‧大樟)‧Scheluo(新羅)‧Sunischien(順義汛)이라든지, 중국과의 경계가 남경만(bocht van Nanckin)이라든지, 또 Jipamsansiang(입암산성)‧Namman Sangsiang(남한산성)이 ‘엄청나게 높은 산(seer hoogen bergh)’이라고 한 것이며, 게다가 조선은 12개의 왕국(coninckrijken)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한반도와는 지리적‧생존환경적 상황설명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들이 통상 인식해온 정통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하멜 일행이 탄 배가 비록 폭풍우로 표류했다지만, 그 표류로 말미암아 한반도 남쪽의 제주도로의 표착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는 결론이다. 그 이유는 본문의 해설에서 밝히고 있지만, 파도를 타며 지낸 나의 해상경력 12년과 그 30년의 해군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볼 때, 하멜 일행이 탄 스뻬르베르호(Jacht de Sperwer)는 대만과 복건성 사이에서, 5일이 지났다 해서, 심한 폭풍우(아마도 태풍)에 휘말린 만신창이의 상태에서는 결코 그곳을 벗어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035°의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가정하더라도, 991㎞(2642.7리)나 머나먼 한반도 남쪽의 제주도까지의 표착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하멜 표류기》의 번역문을 보면, 번역자들마다 그 내용에 충실하려고 애쓰긴 했다고 보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조선에 최초로 알려진 시기가 특히 1920년 전후인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그 원문과는 달리 지리적 환경 설명은 애써 친절하게 그려놓은 지도까지 모두 한결같이 한반도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내가《하멜 표류기》의 번역에 스스로 도전한 이유는 불가능을 극복할만한 자신감이 섰기 때문이다. 이 네덜란드어 원문《하멜 표류기》번역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즉 네덜란드어 원문을 한글로 번역은 비록 지난날 약간의 변질이 있었을지라도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는 후틴크 영인본을 대본으로 하여, 하멜의 조선 표착 350주년을 맞아 새로운 시각에서 지리적으로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이며, 그 내용의 지리적 환경이 한결같이 중국대륙이라는 것이다. 즉 그 동안의 경멸되다시피 한 하멜에 대한 편견적 내용이 매우 예리한 관찰력으로, 정확‧상세한, 거의 틀림이 없는,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는 매우 순응하면서 의미부여‧자기합리화로써 상대에게는 배타적으로 나타내지만, 그 익숙에 내재된 부조리에는 너무도 너그러운 나머지 무감각하고 무디어져서 도전하거나 문제점 도출에는 오히려 소극적‧방관적 태도로 일관하여 매사에 소홀한 편이다. 그 이유는 일제 식민시대를 겪으면서 오직 강요의 경직된 주입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1세대쯤, 즉 35년 16일(1만2774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과 위력은 대단하여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지금 조선에 관한 역사문헌은 90%가 사실이라면, 나머지 10%(?)는 일본식민지배자 및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거짓 조작된 내용이며, 지금의 학자들은 그 10%의 장단에 휘말려 놀아나고 있는 형편인 것 같다.
10%(한반도 조선)의 조작이 90%(중국대륙조선)를 좌지우지하며, 참과 거짓을 가려내지 못하고 아직도 학계에서는 조선이 한반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그 10%의 모순 속에서 몸부림으로 살면서도 90%의 진실을 보지 못했지만, 이제야 그 10%로써 90%의 실체까지 알아내어 중국대륙 자체가 조선임을 발견하였다.
그 진실의 증거를 댄다면, 이《하멜 표류기》가 하나의 대변이 될 수 있으며, 이미《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 그 숨은 비밀을 찾아서》라는 책을 간행하여, 조선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고,《茶 한 잔에 띄우는 조선 역사》에서 茶를 통하여 조선의 작은 실체를 입증하였으며, 또 앞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신증 동국여지승람>의 토산물을 분석한《조선의 토산물은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책도 머지않아 지상으로 햇볕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책들이《하멜 표류기》의 그 지리적 환경이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으며, 완전히 중국대륙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특히 김종윤 선생과의 끊임없는 토론은 값진 보배보다도 더 귀한 시간 속에서 맺어진 열매다.
이제 앞으로 역사의 문제는 조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부터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검정으로써 예측컨대, 결국 중국이 그들 스스로 조선의 역사를 다시 찾게 될 것이며, 중국의 뿌리는 조선이었다는 사실도 밝힐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대한민국 사람들보다도 더 일찍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전혀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먼저 필자의 아내에게 꺼내 보이며, 하멜이 다녀간 곳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라고 하자, 지금까지 무엇이든 믿어주었던 아내조차도 나의 말에 처음엔 어이없다는 듯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한 가지씩 들춰내는 지명‧동물‧식물 등에서 더 이상의 의심없이 나의 말에 동의하였다. 내 두 딸들과 사위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더욱 기쁜 일은 군대가 좋다며 해군이 된 막내아들 성혁은 숫제 출판비에 보태 써달라며 바다와 싸우면서 모은 코 묻은 돈을 성큼 내놓았다. 너무도 대견스러워 가슴이 몽클하였다.
어쨌든 초기인식이 지식의 근원이 되고, 잘못 인식된 지식이 더욱 배타적 성격을 지니게 하므로, 아무리 진실을 주장하더라도, 앞으로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역사인식의 변화가 있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란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연구를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나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구에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을 뿐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걸 수 있는 학문의 길이기 때문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는 조선의 강역에 관계가 없을까?
지금의 역사는 혼돈 자체이다. 진실은 조선, 한국에 달렸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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