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이경구]
“We the People”을 찾아서
필라델피아 국제공항 로비로 나오니, 올버니에 살고 있는 아들과 중학생 손자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들 승용차를 타고 델라웨어강을 따라 난 동쪽 방향 95번 고속도로를 달리어,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있는 힐턴 가든 인(Hilton Garden Inn)에 여장을 풀었다. 아들의 관광 초청을 받고 시애틀에서 왔다.
이튿날 우리 가족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체스넛 스트리트 520번지에 있는 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날씨 좋은 여름날, “We the People”을 찾는 여정에 나선 것이다. 내가 “We the People”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연전에 아들이 우리 부부에게 보스턴 티 파티 선박과 박물관(Boston Tea Party Ships and Museum)을 구경시켜 주었을 때였다. 카우보이모자의 가이드가 성조기와 We the People이란 글이 쓰인 포스터를 양쪽 손에 들고, 보스턴 티 파티는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던 말이 기억에 새롭다.
저만치 지붕에 뾰족탑이 있는 붉은 벽돌 2층 건물이 보인다. 독립기념관 동쪽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안내인은 관광객들에게 이 회의실에서 미국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첫째로 제2차 대륙 회의가 1775년 5월 10일부터 여기서 열렸는데,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한 조지 워싱턴이 6월 15일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둘째로 1776년 7월 4일 여기에 13개 미국 식민지주 대표가 모여 미국은 영국에서 벗어난다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독립선언서에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이 명기되었다. 셋째로 헌법 회의가 1787년 5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여기서 열렸다. 헌법 회의 의장에 뽑힌 조지 워싱턴이 의견을 조정하여, 1787년 9월 17일 대표들이 헌법에 서명하였다.
새 헌법은 모든 13개 주의 비준을 얻어서 1789년 3월 4일 발효하였다. 헌법 중의 전문(前文)을 한국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 합중국의 인민(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은 더욱 완벽한 연방을 만들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안녕을 보장하고, 공동의 방위를 마련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며, 우리들과 우리 후손에게 자유의 축복을 확보해 주기 위해, 미국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의 처음 세 낱말 “We the People”은 정부가 인민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란다. 내가 찾고 있는 “We the People”이 여기에 있다.
우리 일행은 회의실 앞쪽 건물에 있는 자유의 종 센터(Liberty Bell Center)로 갔다. 양쪽에 쇠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 가로대를 올려놓은 다음, 길이가 3피트쯤 되는 종을 매달아 놓았다. 그 당시 종탑에 걸려 있던 자유의 종을 쳐서 독립선언서가 채택되었음을 알렸다. 자유의 종은 미국 독립의 상징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자유의 상징이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자유의 종을 “The Liberty Bell is a very significant symbol for the entire democratic world.”라고 불렀다. ‛자유의 종’은 민주주의 세계의 중요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종 양편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나는 제목이 <우리들 인민의 박물관(THE MUSEUM OF We the People>이라고 쓰인 팜플릿을 들고, 몇 걸음 앞서서 국립 헌법센터를 향해 걸어갔다. 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허연 대리석 벽면 위쪽에 “One country, one Constitution, one destiny DANIEL WEBSTER 1837”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헌법 하나의 운명’이란 말이다. 국립 헌법센터는 헌법을 주제로 하는 세계 유일의 박물관이란다.
우리 일행은 그랜드 홀 로비를 지나 시드니 킴멜 극장으로 들어갔다. 원형 극장의 의자에 앉으니까, 여성 배우가 나와서 “We the People”이란 말을 시작으로 헌법의 역사에 관해 설명하였다. ‛Freedom Rising’이라는 공연도 보았다. 무엇보다 독립 전쟁의 모습이 실감이 났다. 헌법 역사전시관에 들어가 헌법 제정 때부터 현재까지의 헌법에 관한 자료를 둘러보고, 독립 선언 서명자 홀(Signers’ Hall)로 자리를 옮겨 서명자 입상들도 보았다. 국립 헌법센터를 나와서, 크라이스트 처치 버려얼 그라운드(Christ Church Burial Ground)로 벤저민 프랭클린의 무덤을 방문하였다. 프랭클린은 헌법 회의 회원 중 최고령자였다.
미국 역사책에 보면, 조지 워싱턴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뽑혀, 1789년부터 1797년까지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상원에서는 대통령을 권위 있는 호칭을 써서 부를 것을 제안했으나, 워싱턴은 Mr. President로 불리기를 원하였다.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이 “We the People”임을 유념하고 있었다.
호텔에 묵은 지 3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오늘도 관광하기에 좋은 날씨다. 우리 가족은 록리지 헌팅던 파이크 500번지에 있는 론뷰 공동묘지(Lawnview Cemetery)로 ‛이 태산의 묘(1899 RHEE TAISANAH 1906)’를 찾아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7년밖에 살지를 못한 이 태산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7대 독자다. 조그만 이 태산 비석 옆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꽂혀 있고 주위에는 잡초가 많이 나 있었다.
아내는 비명을 보자, “태산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찾아 미국에 와 병으로 죽어서 여기에 묻혀 있다니 마음이 착잡하구나!” 하고 울먹이며 손으로 주위에 있는 풀을 뜯었다. 나는 아들에게 이승만은 청년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와, 조지 워싱턴 대학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라고 일렀다. 가족과 함께 묘비를 향하여 묵념을 올리고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아들은 우리 셋을 차에 태우고, 밸리 포지 비지터 센터(Visitor Center at Valley Forge)로 달렸다. 필라델피아에서 서쪽으로 18마일이 떨어진 스쿨컬강 바로 남쪽에 있었다. 지붕이 벙커 모양같이 생긴 센터로 들어갔다.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고, 소극장으로 들어가 「동절기 야영장 밸리 포지」라는 제목의 영상을 관람하였다. 독립군이 총검을 들고 야영장에서 눈을 맞으며 훈련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 준다.
아들은 다시 우리를 차에 태우고, 스쿨컬강의 남쪽 밸리 크리크 입구에 있는 워싱턴 사령부(Washington’s Headquarters)로 향하였다. 이 붉은 2층 건물이 조지 워싱턴의 지휘소였는데, 워싱턴은 건물주에게 집세를 지급했으며 음식도 손수 만들었다고 안내인이 말한다. 부엌을 보라고 하기에 보았더니, 냄비를 매달고 나무로 불을 피워 요리하는 부엌이었다. 손자를 데리고 독립군이 언덕에 통나무로 만든 막사들과 훈련장도 답사하였다.
조지 워싱턴은1777년 12월부터 1778년 6월까지 12,000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워싱턴 사령부 남쪽에 있는 밸리 포지로 와서 훈련하며 전의를 새롭게 하였다. 그해 겨울은 추워서 한기와 질병 등으로 독립군 2000명이 목슴을 잃었다. 독립군은 1778년 6월 밸리 포지를 나와 반격을 개시하여, 1777년 영국군에 점령당한 필라델피아를 탈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군이 뉴욕시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이 끝나자, 위싱턴은 1783년 12월 23일 대륙군 총사령관의 직을 사직하고 마운트 버어넌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날은 우리 일행이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인근 노스 12스트리트 51번지에 있는 리딩 터미널 마켓(Reading Terminal Market since 1898)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팜플릿을 주기에 받았다. 80여개의 재래식 가게가 다양한 국적의 요리와 식자재를 판매한다고 쓰여 있다. 아내는 진열장 안의 식재료를 자상히 보았다. 아들이 보이지 않기에 찾았더니, 저만치서 돼지 마스코트의 입에 대고 입맞춤을 하고 있다. 손자가 좋아하는 치킨을 먹고, 5대째 가게를 한다는 바셋 아이스크림(Bassettts Ice Cream)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북 눅(BOOK NOOK)이라는 조그마한 어린이 독서 코너에 앉아서 쉬었다가, 워싱턴 DC를 향해 길을 떠났다.
홀리데이 인 호텔 창문 밖에 미국 수도의 첫날이 밝았다. 우리 일행은 호텔을 나와, 주변 거리를 산책하다가 맥도날드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아들이 열 군데는 관광해야 한다며, 미국 헌법 원문이 보관된 국립공문서 박물관(National Archives Museum)으로 안내하였다. “We the People”의 원본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신명이 솟았다.
컨스티투션 애비뉴 700번지 코너에는 관람객이 장사진를 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국립공문서 박물관을 찾았다. 로톤다 홀(Rotunda for the Charters of Freedom)에 들어가, 허리에 권총을 찬 경찰이 지키고 있는 독립선언서, 미국 헌법,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원본을 관람하였다. 위쪽이 유리로 된 안전 상자에 들어 있는 자유의 헌장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헌법이란다. 글씨가 몹시 바랬으나, 고문서들은 생명을 지니고 관람객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고문서 전시실로 갔더니, 제2차 대륙회의에서 1781년에 만든 첫 번째 헌법인 연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의 원본도 있다.
미국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 오후가 되자, 우리 가족은 컨스티투션 애비뉴로 가서 군인, 경찰, 고등학생 등 각계 단체가 고유의 의상을 입고 벌이는 독립 기념 행진을 구경하였다. 그중에는 ‛法輪大法 (FALUN DAFA)’이란 광고판을 차에 싣고 춤을 추며 행진하는 단체도 있다. 이날 밤에는 의사당 앞쪽의 대형 잔디밭에 앉아서, 워싱턴 기념탑 너머에서 하늘로 쏘아 올리는 불꽃 놀이도 보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여름밤을 편안히 즐기라고, 아들은 접이식 의자를 차에 싣고 왔으며 또 여름에 오는 비에 대비해 우산도 식구 수대로 가지고 왔다.
나는 호텔 방에 돌아와 미국 헌법을 생각해 보았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헌법 제정과 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건국 선조 중의 한 사람이다. “We the People”은 미국 헌법의 대명사다. “We the People”은 자유 민주주의 헌법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인즉, 2번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대통령을 더 하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마운트 버넌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다. 그 절제의 미덕이 조지 워싱턴이 국부로 추앙받는 이유임을 피부로 느낀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세운 2번의 대통령 임기 전통은,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깬 것 이외는 철칙처럼 지켜졌다. 루스벨트 대통령 사후에는 대통령 3선 출마 금지법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호텔에 더 묵으며, 국회의사당과 자유의 동상, 의회 도서관, 최고재판소, 링컨 기념관, 알링턴 국립묘지, 존 F. 케네디 부부 묘지, 그리고 한국 전쟁 참가 용사 상도 보았다. “We the People”의 정신을 나타낸 예술품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은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필라델피아 국제공항을 향해 차를 달렸다. 아들이 시켜 주는 여름 관광이 끝난 것이다. 아들 덕에 11일간을 뜻있게 보낸 여름이었다.
□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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