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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평양에는 우물이 없다! / 최두환

<닥터 홀의 조선회상>의 독후감
등록날짜 [ 2019년01월02일 13시33분 ]

[최두환 칼럼]

평양에는 우물이 없다! 

- <닥터 홀의 조선회상>의 독후감 

 

 

한국은 옛날에 과언 어떤 나라였을까?

지리적 특성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야 어느 나라이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들에게는 조선이란 한국의 정신이고, 우리들의 자존심과 명예 그리고 전통을 이어주는 값진 유산이기에 더욱 관심이 많지 않을 수 없다. 고산자 김정호가 그렸다는 두만강 백두산 압록강으로 이어진 남쪽 지역의 반도를 우리는 줄기차게 한국이라고 한다. 조금 넓혀봐야 그 북쪽을 만주라고 한다.

 

그런데 서세동점기라는 특별한 시기,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시기에 조선을 다녀갔고, 조선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지리적 문제라든가, 문화풍습은 지금의 한반도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상활을 기록하여져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그 역사를 알고 싶고, 역사를 비판하고 싶고, 진실을 캐고 싶으면 가능한 원문을 보아야 한다. 그 원문을 보기 어려울 때는 적어도 그 번역된 글이라도 봐야 하며, 그렇게 하여 읽고서 의심이 날 때에에는 어떤 방법을 써더라도 원문을 구하여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나는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 빠진 적이 있다. 그 책의 번역자와 통하여 "원문"을 구해보고 싶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구태어 더 구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원문으로서 더 밝혀낼만한 거짓된 진실과 참된 진실을 구분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읽어보고 정말 원문이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구해볼 것이다.

 

여기서 오늘은 또 하나의 진실을 찾고 싶다. 지난날 <독립신문>을 읽었을 적에 "서울의 물은 거름[퇴비]물이라고 한 바가 있다." 먹을 수 없는 더러운 물이란 말이다. 그러면 평양의 물은 어떨까?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평양에는 우물이 없어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강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p.153]

 

위의 글에서 "강"이란 무슨 강일까? 닥터 셔우드 홀이 "대동강"을 몰라서 보통명사인 "강"이란 말로서 끝냈을까? 그 유명한 대동강을 말이다. 봉이 김선달이 팔아먹었다는 대동강물 말이다. 조선은, 아니 한반도는 금수강산이라고 하여 먹는 물만큼은 어디서나 좋았고,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는 이 한반도에도 아무 곳이나의 물을 마실 수가 없게는 되었지만, 그 전에는 어디에나 물이 나왔고, 땅을 파면 물이 나왔다. 그런데 189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와서 5년 동안이나 선교사업과 의료봉사사업을 병행한 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그들이 있었던 곳, 평양에 우물이 없어서 1킬로미터나 걸어가서 물을 길러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임무를 선교사협회에서 임명하였다.

 

우물물이 없는 곳은 왜 그럴까? 왜 평양엔 우물물이 없었을까? 혹시 평양 사람들은 우물을 팔 줄을 몰랐을까?

 

"평양은 석탄 광산, 금광, 농산물 등으로 조선에서 가장 풍요한 항구가 될 승산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고, ..."[p.159]

 

석탄이나 금강이 나는 곳이면 물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농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물이 풍족하다는 것이 아닐까? 농사지을 물은 풍족한데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다는 말일까? 참으로 궁금하게 만든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게 말이다.

 

"여행 가방과 트렁크들은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장장 45킬로미터동안 줄곧 지게에 져서 날랐다."[p.73]

"우편물은 이번 겨울 동안은 3주에 한번씩 보내고 받지만, 대체적으로 약 2주에 한번씩 보내고 받는다. 우편물이 제물포에 도착되면 그 표시로 신호기가 올라가는데, 우리는 이 깃발이 오르는 걸 보느라 가슴을 조인다."[p.92]

 

닥터 셔우드 홀은 서울에 있으면서 우편물을 보내고 받았는데, 제물포에서 신호기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게 45킬로미터이겠는가? 아니면 서울과 제물포를 훤히 바라볼 수 있는 같은 지역이겠는가? 그리고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짐을 지게로 지고 날랐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하다. 그 조선의 짐꾼 말이다. 인력거가 1시간에 6킬로미터를 달렸다고 했으니, 지게를 지고는 얼마의 거리를 갈 수 있을까? 요즘에는 건강을 많이 생각하여 하루에 1만보 걷기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만보기로 계산하면 6.5km 정도다. 그러니 그 기록의 진실을 참으로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서울시와 근교의 인구는 약 1백만 명이다." [p.90]

"한강에 닿기 전에 모래밭을 지났는데, 마치 사막을 가는 것 같았다. 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p.74]

 

한강 백사장이란 말을 들어보았다. 나는 1970년과 1971년 2년에 걸쳐 가을철 전국체전에 선수로 참가한 적이 있다. 종목은 "조정(Racing Boat)"인데 나는 2번 스트로커였다. 4인조도, 8인조도 금메달를 따기도 했다. 지금의 나의 신체는 키가 보통이고, 근육도 이젠 다 사그러져버린 추억의 영웅으로 남아있지만, 그 당시에 그 한강 백사장에서는 힘께나 쓸 줄을 알았고, 조정 경기란 말만 나오면 우쭐대며 흥분의 도가니에 싸이는 터전이 한강이었다. 그곳에 홍수가 나기도 했지만, 경기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 한강 백사장이 "사막"처럼 느껴지는 곳은 어디에도 한 곳도 없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곳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닥터 셔우드 홀이 어디의 한강을 보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것일까? 이것이 나는 너무도 궁금하다. 이 한강가에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땅을 파서 우물물을 길러 먹기도 하였다.

그런데 1896년의 <독립신문>엔 서울 물이 "똥물"이라고 했다. 그 낱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1892년에 서울에 왔고, 평양에 도착한 닥터 셔우드 홀은 그 평양에 우물이 없었다고 했다. 한강이 사막처럼 보였던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런 때문에 평양에는 우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c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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