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구 칼럼]
시애틀 추장의 편지
2009년 4월 초에 내가 시애틀 근교로 이민을 와서 동포 문인에게서 맨 먼저 들은 이야기는 시애틀 추장의 편지에 관한 것이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인지라 호기심이 일었다.
동포 문인에 따르면 시애틀 추장(Chief Seattle)은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늘이나 땅을 사고 팔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추장의 글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환경 운동가들이 복음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다음 달인 5월 하순에 아내와 더불어 시애틀 다운타운의 파이어니어 광장에 있는 시애틀 추장의 흉상을 찾아갔다. 광장에 들어섰더니 가로등에 ‘Where Seattle begins’라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다. 추장의 흉상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의 모습과 같다.
일찍이 2002년 10월에 제주대학의 김병택 국문학 교수는 『한국 문학과 풍토』라는 저서를 내었다. 그 논총의 내용에는「시애틀 추장의 편지」라는 논문이 있는데, 그 글에는 이런 해석이 적혀 있다.
“시애틀 추장은 1855년에 당시의 미국 피어스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당신들은 인디언 땅을 사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늘과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습니까? 이 땅의 모든 구석구석이 우리들에게는 신성합니다. 반짝이는 소나무잎,
숲속의 안개, 곤충 하나하나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에는 모두 거룩합니다.’ 이것은 자연
환경을 효용 가치로 판단하는 미국 정부에 대한 추장의 준엄한 경고였지만∙∙∙∙∙∙.”
나는 위의 글을 읽고 글의 내용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시애틀 추장은 나라도 없었고 문화를 기록할 문자도 부족과 살던 땅을 지킬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환경 운동가도 아니었다. 그런 인디언 추장의 편지가 ‘미국 정부에 대한 추장의 준엄한 경고였다’라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시애틀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그런 편지를 썼다면, 인디언 땅을 미국 정부에 팔아야 하는 비애를 호소한 글이 아니겠는가.
또 김중위 수필가는 2009년 <수필문학> 5월호에「시애틀에서 시애틀 추장을 만나다」라는 수필을 실었다. 김중위 수필가는 그 작품에서 시애틀 추장의 묘를 찾아본 소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디어 오셨군요! 우리들의 정령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저 높은 산의 바위덩어리나
반짝이는 날개를 휘저으며 흐르는 개울이나 알을 품고 있는 산새들까지도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문명인들은 분명히 말해 대지(大地)에게는 원수입니다. 문명인들은
너무나 식욕이 넘쳐흘러 대지를 마구 먹어 치웁니다.
이 글은 내가 두 번째 시애틀 시(市)를 방문하는 길에 수소문하여 찾아간 시애틀
추장(1786-1866)의 묘소 앞에서 그로부터 들은 얘기다.”
이 작품은 필자가 시애틀 추장을 자연 보존 주의자로 떠받드는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자가 글을 지어 환경 보호론자들을 위한 복음처럼 전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인디언을 사랑하는 데도 내 정서는 그렇다.
시애틀 추장의 친구요 의사였던 헨리 스미스 박사(Dr. Henry A. Smith)는 1887년 10월 29일 <시애틀 선데이 스타(Seattle Sunday Star)>지에 「시애틀 추장의 연설(Chief Seattle’s Speech)」이라는 칼럼을 실었다. 그 칼럼의 내용인즉, 시애틀 추장과 아이삭 스티븐스(Isaac I. Stevens) 와신턴 주지사가 1854년에 시애틀 근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추장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백색 추장이 토지를 사고 싶으며 우리들을 평안하게 살게 해주고 싶다고 제의하였다. 우리들은 그것을 수락할 것이며 당신들이 제공하는 보호 구역으로 갈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는 조상의 전통들이다. 조상들은 푸른 계곡과 산과 호수들을 사랑한다.” 시애틀 추장과 아이삭 스티븐스 주지사가 만난 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 후 1971년에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학 교수인 테드 페리(Ted Perry)는 「고향(Home)」이라는 제목으로 ABC TV 의 드라마 대본을 썼는데 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와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대들은 어떻게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가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숲 속의 안개,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 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추장 이름을 빌린 필자의 말이다.
훗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직원인 제리 크라크(Jerry L. Clark)는 관리청이 발행하는 1985년 <프로로그 (Prologue)> 봄호에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 실증이 없는 연설의 이야기(Thus Spoke Chief Seattle: The Story of An Undocumented Speech)」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강평이 씌어 있다.
“아무도 연설의 믿을 만한 증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추장의 연설은 미국 인디언
문학 선집에 자주 나타나는데 출처가 적혀 있지 않다. 관리청 문서에 보면 추장은
‘나는 그대를 아버지로 생각한다. 이러한 느낌을 서류로 위대한 아버지에게 보낼
것이다’라는 기록만 있다.”
올해 12월 초에 우리 부부는 아들과 함께 서쪽 내해인 퓨젯 사운드(Puget Sound) 너머 스쿼미시(Suquamish)의 공동묘지에 있는 시애틀 추장의 무덤을 찾아갔다. 나는 말없이 묘역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잔디로 덮힌 무덤 위에는 백색 대리석 재질의 반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주사위 모양의 빛 바랜 비신이 서 있다. 앞면에는 ‘Seattle, Chief of the Suquamish and Allied Tribes, Died June 7, 1866, SEALTH’, 뒷면에는 ‘Baptismal name, NOAH SEALTH, Age Probably 80 Years’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비신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외로워 보였다. 바로 무덤 앞에는 성조기가 꽃혀 있다.
우리는 스쿼미시의 공동묘지를 나와 동쪽 퓨젯 사운드와 접해 있는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바닷가에는 음식점과 상점들이 있다. 자그마한 선물 가게로 들어갔더니, 등이 꼬부라진 백인 할머니가 장신구와 인디언에 관한 책을 팔고 있다. 아내는 며느리에게 줄 귀걸이를 하나 샀다. 그 백인 할머니는 자기 남편이 100퍼센트 스쿼미시 부족이었다고 하였다.
내년 봄에는 아내와 함께 퓨젯 사운드의 블레이크 섬(Blake Island)에 있는 시애틀 추장의 고향인 틸리컴 빌리지(Tilicum Village)를 방문하여 인디언식 요리도 맛보고 그들의 민속춤도 구경하고 싶다. 틸리컴이란 인디언 말로 ‘친절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는가.
□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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