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 칼럼]
핏속에 흐르는 나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라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하나 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너무도 다양해서 하나 되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한 하나 되기가 꿈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환상적 욕망을 통해 이 불가능한 꿈을 강력하게 혹은 무모하게 시도하기도 한다.
분열은 삼분오열이든 단순한 양분이든 분명한 문제의 발생을 통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출발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성공한다. 분열 중에도 양분은 최선의 정상적 분열이라 볼 수도 있다. 어느 시대에도 어느 땅에도 분열은 있었다. 이 분열은 생명의지와도 관계가 깊다. 살기 위해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분열과 통합은 상호 충돌이나 화해를 통해 숱한 반복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옳고 그름에 따라 분열이 판단되지는 않는 이유이다. 저마다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상대를 비방하고 싸우고 결국에는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부림이든 극렬한 전투이든 그것이 상식이나 법이나 도덕성을 따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상대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 생명체의 본성이다.
하나가 된 상태의 평화가 나은 것이냐, 분열된 상태의 평화가 나은 것이냐, 하는 것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발전을 위한다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분열된 상태에서의 평화가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상반된 서로의 의견이 가끔은 충돌하기도 하면서 성숙된 대화를 통해 양자 간 타협과 양보가 있어야 그 평화가 지속이 되고 그 안에서 사회는 더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핏속의 노래를 들어라. 자신의 피가 노래하는 진실한 노래를 들어라. 누군가에게 이끌리거나, 누구의 말에 괜시리 동조하거나, 아니면 자신 스스로의 생각조차 포기하고 엉뚱한 신념으로 움직이지 말고, 수천 년 수만 년 조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변함없이 흘러내려온 내 핏속의 건강한 노래를 들어라. 내 핏속의 진실된 노래가 들리지 않으면 다시 침잠하는 시간을 통해 피의 노래를 들어보라.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 노래를 듣고 그 노래를 부르며 그 노래에 따라야 나는 물론 내가 사는 세상이 건강해질 것이다. 내 핏속의 노래를 듣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세상도 아니다.
우리는 분열에 익숙하다. 삼국으로 갈리고 양국으로 나뉘고 지역으로 흩어지고 다시 세대로 흩어지고 종내는 생각과 신념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분열이 문제는 아니다. 그 분열이 어느 방향으로 튀느냐의 문제이다. 하나이든, 분열이든, 그것이 핏속의 노래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결국에는 살아남기 위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나만 살아남을 것이냐, 함께 살아남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상대만 소멸시킬 것이냐, 아니면 공멸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분열을 유도해 배부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리하진 못했다. 다시 분열을 조장하여 눈앞의 승리를 취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눈을 더 멀리 바라보기를 바란다. 자신의 비극적인 모습이 거기에 서있을 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핏속에 흐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 피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우리의 건강한 생명의 피일 뿐이다. 핏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노래를 들어라. 핏속에 흐르는 어머니의 노래를 들어라. 핏속에 흐르는 누이 고모의 노래를 들어라. 핏속에 흐르는 나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라.
□ 장종권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계간 《리토피아》 편집인 겸 주간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jj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