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구 칼럼]
『최은희의 고백』을 읽고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신나게 본 영화는 1961년 1월에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다. 김진규와 최은희가 주연으로 출연하여 관람객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영화의 여주인공 최은희가 2007년 올해 11월에 77세의 생일 기념으로 『최은희의 고백』이라는 책을 내었다. 표지에는 은막의 스타 모습인 흑백 얼굴 사진이 실려 있으며 사진 밑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란 부제가 적혀 있다.
이 책 『최은희의 고백』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대목은 신상옥 최은희 납북 사건이다. 지은이가 담담하게 토로하는 그 천인공노할 만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양예술고교의 최은희 교장은 1978년 1월에 예술고등학교 자매 결연을 위해 홍콩에 갔다가, ‘리펄스 베이’라는 해수욕장에서 북한 장정들에 의해서 하얀 모터보트에 강제로 실렸다.
“최 선생, 지금 우리는 김일성 장군님의 품으로 갑니다.”
“뭐, 뭐라고요?”
최은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북한 장정들이 손목이 묶인 자기를 끌고 화물선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을 때 정신이 돌아왔다. 그들은 최은희를 선장실에 데려다 놓았다.
그해 1월 22일 오후 3시쯤에 최은희는 북한 땅을 밟았다. 눈앞에 김정일이 나타나 그녀를 리무진에 태우고 평양으로 달렸다. 김정일은 과수나무 너머 별장에 최은희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듬해에 원흥리로 이사한 후부터 몰래 생활 수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최은희라는 여배우가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외로히 죽어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서였다. 훗날 북한에서 만난 신상옥 감독과 북한을 탈출할 때 가지고 나왔다.
이 대목을 읽어 보자, 나는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 Anne Frank)』라는 책을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연상되었다. 그녀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던 암스테르담에서 은신처에 기거할 때인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일기를 썼다. 독일군에 발견되자 베르겐 베르젠 수용소로 끌려가 지내다가 티프스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최은희는 1983년 3월에 3년 만에 연회에 초대되었다. 주석단에는 3년 만에 보는 김정일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지더니 음악 소리가 멎었다.
“저기 좀 보시오. 누가 오나······.”
옆에서 강해룡 부부장이 출입구 쪽을 가리켰다. 한 남자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회색 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분명 신상옥 감독이었다.
“포옹 좀 하지. 왜 그러고만 서 있소?”
멍청하게 서 있는데, 굵고 걸걸한 김정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레 신 감독을 만나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그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홍콩에서 최은희의 족적을 찾다가 납치되었다.
그 후 신상옥 감독의 생일 다음 날인 1983년 10월 19일에 김정일이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면담을 30분쯤 하고 식사를 하기로 되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 3시간이나 걸렸다.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북한 영화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해 감독으로는 신 선생을, 우리 배우들을 지도할 수 있는 교육자로는 최 선생을, 이렇게 두 분을 선택하게 된 겁네다.”
김정일은 “좋은 영화만 만들어 주구래.” 하면서 신상옥 감독이 만드는 영화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 연간 미화 300만 달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은 1986년 3월에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베를린 영화제 개막과 폐막 파티에 참석한 후에는 부다페스트로 가서 일을 보고 비엔나에 도착하였다.
그들 부부는 호텔 카운터에 근무하는 일본인 직원을 만났다. 신상옥 감독은 상의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꺼내어 미국대사관에 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교토통신의 에노키 부장과 함께 택시를 타고 공원 쪽으로 달렸다. 교통 혼잡 때문에 미국대사관 근처에서 내려 대사관 유리문 앞까지 달려가 문을 밀치며 들어갔다.
최은희의 자서전을 읽고 나니, 북한의 인권 문제와 우리의 통일 정책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국군 포로와 납북자들은 자유가 얼마나 그리울까? 참여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햇볕 정책은 올바른 선택일까?
통일연구원의 손기웅 연구위원은 1999년 7월 <외교> 제50호에 발표한 「선진민주사회 건설과 대북정책 및 통일정책의 방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대북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체제경쟁은 이제 끝이 났다. 정치적 민주화의 성숙도에서, 경제력에서 북한은 우리에게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북정책의 중점은 체제경쟁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선진민주사회로 좀더 성숙시켜 나가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를, 우리 사회를 그들이 함께 하고픈 체제로 인식시켜 나가는 것이다.
성숙된 우리 사회를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려는 마음을 열어가게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런 통일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호주의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외교의 기본인 ‘주고받기식 거래(give-and-take deals)’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날에 서독도 동독을 지원하는 대신에 동독이 개방과 개혁을 하도록 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참여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햇볕 정책 곧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경제 지원과 협력은 국민의 정부 때부터 추진된 대북한 정책이다. 홍순영 전 통일부 장관은 2007년 5월 〈외교〉 제81호에 「아시아 속의 한국 외교」라는 표제로 논문을 썼는데, 그 글에 이런 말이 있다.
“햇볕 정책은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것이며 북한의 개방과 개혁 그리고 경제개발을 도와 남북한 간의 경제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책이다. 평화공존을 거부하는 핵개발의 위협에 대하여는 단호한 거부의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햇볕 정책은 평화를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번영하는 통일한국을 지향하여 북한을 도와준다는 제의이다. 평양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그 제의는 살아 있을 것이다.
햇볕 정책은 우리의 가치관에 입각한 온당한 제안이었다.”
햇볕 정책이란,『이솝 우화(Aesop’s Fables)』에 나오는「바람과 해님(The Wind and the Sun)」에서 유래된 것이다. 햇볕 정책을「바람과 해님」 우화의 따뜻한 햇볕에 비유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한의 경제 지원과 협력은 김정일 체제를 위협하는 무서운 강풍이다. 일방적인 포용 정책은 북한을 자꾸 체제 강화의 길로 나가게 할 것이다.
□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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