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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충무공 리순신 연구의 고백 / 최두환

등록날짜 [ 2019년01월25일 22시43분 ]

[최두환 칼럼]

충무공 리순신 연구의 고백

 

 

아킬레스건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보다 오히려 강화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킬레스(Achilles)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다. 그 아들 아킬레스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스틱스(Styx) 강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으로 잡은 그의 발목은 젖지 않았고, 이것이 약점이 되어 용감한 영웅 아킬레스는 트로이(Troy) 전투에서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 그리하여 발뒤꿈치 위의 힘줄을 가리켜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르며, 비유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일컫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 다만 그 약점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부분을 좀 더 보완하여 강점으로 살려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남의 약점을 들추기보다는 관용과 아량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고 우리는 배우며 인격을 닦아왔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서 남의 아픈 부분을 들춰내어 그것을 물면 진돗개처럼 절대 놓지 않고, 자신과 그 집단의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여러 사건들을 종종 보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영달과 이득을 위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뒷날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를 많이도 보아왔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인정과 정의, 관용과 불의 사이의 고민이 존재하는 것이다. 혹시 배움과 현실의 차이는 아닐까.

한번 각인되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평생 그 지식대로 살아가기 일쑤다. 이것은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과도 같다. 나는 각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까지 스스로 타인의 길로 걸으며, 번복을 반복하고, 나의 지식을 거듭거듭 뒤집으며, 이제야 남들도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은 몇 가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충무공이라면 한때 백전백승의 리순신(李舜臣)뿐인 줄로만 알았다. 「충무공 리순신의 준법정신」(1996년)이란 논문을 쓰면서 시호 ‘忠武[충무]’인 사람을 찾아보니 11명이고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로도 5명[金時敏(1554~1592)/李守一(1554~1632)/鄭忠信(1576~1636)/具仁垕(1578~1658)/金應河(1580~1619)]이나 된다고 밝혔더니, 그 뒤부터는 덩달아 “충무 시호를 가진 사람이 많다며!”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총통이라면 그 성능이 어땠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문헌에 천자총통은 1000보[千步] 나간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몇 미터 나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현대중공업과 협찬하여 항공우주연구소 채연석 박사가 지자총통 및 신기전 발사 시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신기전에 전념했다. 나는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에 근무시절에 전통무기 복원 팀을 5명으로 구성하여 1993년도에 전국 박물관을 두루 답사하며 소장된 무기류를 실측하고서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별황자총통‧불랑기 등의 대형총통과 대승자총통‧중승자총통‧소승자총통‧별승자총통 등 승자총통과 중완구‧소완구 등의 박격포류를 설계와 복원을 해군정비창 기술진에 의뢰하고서 발사시험을 했다. 처음에 사정거리가 겨우 600m쯤 나가던 것이 대전과 격목 사이의 간극에 문제가 있음을 뒤늦게 찾아내고는 이를 고치자, 제원대로 1~1.5㎞까지 날아갔다. 처음 임진왜란 당시 총통을 복원하여 시험 발사를 해보겠다고 했을 적에 학계에서도 해군 당국에서마저도 하나같이 반대했다. 그 이유는 지금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 400년 전의 총통을 발사시험 하는 것은 과학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며, 발전적이지 못하다며 시큰둥했다. 단지 당시 해군사관학교 교장 류삼남 제독만이 나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끝까지 격려해주어 용기를 얻었고,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도, 행주대첩재현 행사, 통영 한산대첩제에서도 총통발사 시범팀을 지휘하여 재연을 해주어 관람한 국민의 자긍심을 높였다고 자부한다. 보는 사람은 모두 감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막상 성공하고 보니, 왜놈의 조총 유효사거리 200m보다 성능이 우수한 대형총통이고 그 때문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핵심 요인이었다는 해석에 대해 사람들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필승의 정신전력도 중요하지만, 리순신이 거북함[龜艦/龜船]을 만들고 정철총통을 만들어냈듯이, 전투현장에서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파괴력 주먹이 있어야 승리한다는 논리가 적중했다. 몇 차례의 시범을 거치면서 이제는 조선의 전통무기 총통이 일본의 조총보다 성능이 우수하다고, 임진왜란의 승리의 비결이 충무공 리순신의 필승의 정신전력과 탁월한 리더십과 우수한 무기체계에 있었다고 많은 학자들도 당연한 듯이 말하곤 한다.

 

여기서 1보(步)를 우리는 1step와 동일시하여 철석 같이 76㎝로 알고 있고, 군대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1보는 원칙으로 1pace, 즉 2step(두 발짝 걸음)이며, 두 발을 모으고 서서 왼발을 앞쪽으로 걷고 나서 오른발을 그 앞으로 옮겨놓은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1보는 주척(周尺) 6자(尺)이다. 주척의 1자는 평균 21cm이다. 그러면 1보는 1.26m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반보, 즉 1무(武)를 1보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무(步武)도 당당하다’는 본디 말뜻도 모르고서. 그래서 1리는 300보로서 378m이며, 우리가 대개 1리를 4km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틀린 것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그 허용범위는 3m를 넘지 않는다. 이제는 1보가 1 step이 아닌 2 step이라는 사실도, 1리가 4km가 아니라 378m라는 사실도 이제는 나의 주변에서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각인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난중일기』의 맨 첫날에 나오는 ‘長片箭[장편전]’도 마찬가진데, ‘긴 편전’으로 번역되어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런 화살은 없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이라고 지적하였더니, 이제는 당연한 말이라고 맞장구친다.

 

해군대학 지휘통솔 교관으로 1992년도 재직시에 학생 장교들에게 ‘충무공 정신’ 강의를 맡았는데, ‘충무공’이란 말보다는 ‘리순신’이란 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존경하고 흠모하는 세계 최고의 영웅에게 ‘충무공’이나 ‘공’이란 말을 쓰지 않고, 무례하게 ‘이름’을 직접 부른다는 것이다. 이름은 불러달라고 있는 것이며, ‘충무’는 사후 43년째에 붙여진 시호(諡號)이니 만큼, 좋은 호칭임에는 분명하지만 본인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으므로, 학문적 활동에 접근이 쉽고도 친근감이 있도록 이름을 부른다고 했더니, 영어에 ‘call own′s names’하면 ‘누구 욕을 하다/험담하다’란 말뜻을 들이대며, 교관 자격까지 들먹이며 다그치기에, 호칭 문제로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고, 아직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충무공’으로 부르겠다며 물러선 적이 있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나 적어도 1998년 이후부터는 ‘리순신’이란 이름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불리기도 한다. 어떤 부정적 또는 비판적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니, 아마도 이런 호칭도 시대정신인가 보다.

 

이러한 현실은 학계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학위논문으로 ‘리순신의 해전승리의 비결’을 주제로 잡았더니 지도교수가 ‘이순신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연구할 것이 있느냐? 그런 주제로서 학위논문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끝내 주제를 바꾸어 ‘임란시 군선 탑재 무기의 성능 연구’를 다루었으며, 박사과정에서도 ‘리순신의 리더십 연구’를 제목으로 잡아 지도교수와 조율했더니, 역정을 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의 설득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나누면서 국가지도자에게도 리순신과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고 상관과 국가지도자에 대한 리순신의 리더십을 다루는 조건으로 이름 ‘리순신’을 쓰게 되었던 일도 있었다. 내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 일생을 바꾼 계기는 1968년도 가을에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하여 면접시험 때에 하얀 제복을 입은 장교 면접관이 ‘귀하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을 적에 나는 ‘다수결이 아닌 쇠와 피에 의해서만 통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해군 장교가 되려면 충무공 이순신을 알아야 하는데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아직은 모르지만, 합격시켜주시면 충무공을 공부하여 훌륭한 장교가 되겠습니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대답 때문인지 해군사관 생도가 되었고, 소위에 임관하였다. ‘진리를 구하자/희생하자/허위를 버리자’라는 교훈을 몸과 마음으로 꼭꼭 다짐하면서, 당시 조성도 교수의 눈물어린 강의에 감동도 하였다.

 

국방의 시계는 돌아가지만, 초급장교는 바쁜 생활이다. 1977년 해군신병훈련소 제1 대대장(하후생대대)을 맡고, 이듬해에는 제3 대대장(해군신병대대)까지 겸하여 맡았는데, 끝날 즈음에 해군대학 지휘참모 과정에 들어갔다. 3개월 동안 오로지 충무공의 해전사만을 공부하여 실전에 활용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임진왜란 해전을 전투결과보고서 작성하는 요령으로 교훈까지 포함하여 옥포해전부터 노량해전까지 다루어 보았다. 쓰고 보니 대학노트 7권이나 되었는데 육하원칙에서 빠진 부분이 많아 앞으로 체계화하겠다는 나의 숙제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지휘참모 과정을 수료할 적에 성적이 매우 나빴다. 21명 가운데 18등을 했으니, 남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꼴찌를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더 신기했고, 7권의 대학노트에 적어본 리순신 해전사가 오히려 더 자랑스러웠다. 결국 해군대학 지휘참모 과정의 좋지 않은 성적 때문에 소령에서 중령으로의 진급에 치명적 영향이 미쳐 동기생들보다 2년이나 늦었다. 군대는 계급사회인데 후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 때문인지 리순신 연구에 인생을 바쳐 군인으로서의 정년퇴임을 하고, 별정직 군무원으로 정년퇴임까지 하고도 계약직 군무원 2년을 더 근무했으니, 무려 해군생활 43년을 했다. 리순신이 나를 살려주었는지, 리순신 논문만도 50편이 넘으며, 『충무공 리순신 전집』(전6권)을 펴내 제40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받기도 했고, 대서사시로서 『리순신, 승리의 노래』를 1권으로 펴냈으며, 그 서사시를 기획하고 완성하는데 고작 15일 걸렸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제1회 가산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해군대학 지휘참모과정에서 성적이 나빴던 것을 변명하자면, ‘충무공 5대 정신’ 가운데 두 번째의 ‘정의를 앞세우는 정신’에 대해 조성도 교수에게 던진 질문이, 본디 말투가 투박하여, 항의처럼 들렸음직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의는 그저 실천하는 것이지, 충무공이 언제 정의를 앞세운 적이 있느냐?’하는 것이 요지였고, ‘앞세운다는 것은 뒷전에서는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에 고쳐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뒷날 소문에 그분이 나를 몹시 못마땅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했다. 나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가 된 1997년부터는 당당히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으로 고쳐서 쓸 것을 보고하고 가르쳤다. 이제는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정의는 두 말이 필요없이 그저 실천하는 것일 따름이다.

 

나의 『난중일기』 번역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같은 고교를 나왔고, 같은 사관학교를 나왔고, 같은 바다에서 20년 이상을 해상근무도 마찬가지였으면서 무슨 재주로 전서니 초서니 외국어를 읽어내며 번역서를 냈느냐는 것이다. 어느 선배 제독은 해군교육사령관으로서 나의 상관이었는데 어느 동기생이 모 초등학교 교장 이름으로 투서하자,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나를 모자를 벗기겠다며 제대시키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맏딸 시집보내려는 청첩장 드린 1999년 가을은 참으로 서글펐다. 자신의 부하를 지키려 하지 않고,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지휘관에게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고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은 지옥이었다. 옻나무 알레르기가 있어 온몸에 옻이 올라 어쩔 수 없이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그 한 달 동안에 『논어』 원문(李殷相 감수 愼弦重 역, 靑羽出版社 단기4288)을 보며, 그 직역이 이해되지 않아, 한자 하나하나 옥편에서 찾아 뜻을 몽땅 노트에 적어가면서 내 나름의 번역 흉내를 내본 적이 있다. 아직도 그날의 기록을 보며 글을 익힌다. 그 때문에 한문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해군실무 생활에서 바쁜 속에서도 틈만 나면 『논어』는 손에 들려 있었다. 사실 그 실력뿐이지만, 1992년에 『난중일기』 번역에 도전했다. 밤낮을 잊은 듯이 초서에 권위를 가진 한국서화교육협회 리인섭 회장을 만나보며 초서의 특징을 배웠다. 또 서예가 청계 안정환 선생을 만나 내가 모르는 글자를 알아내곤 했다. 전서체는 시인이요 서예가로 이름난 절로 최성민은 나의 가까운 친척이라 격의 없이 묻기도 했다.

 

선학자의 도움은 학문의 필수 재산이다. 노산 리은상의 번역과 여수 정희선 선생의 번역을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내 생각을 엮어 나갔더니 세월이 흘러도 초서의 번역은 역시 힘들어 결국 전서본을 먼저 펴내기로 하여 1994년에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完譯 亂中日記』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초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부분 63쪽 8843자 때문에 3년이 지나 처음으로 1996년 말경에 『새 번역 초서 난중일기』를 탈고하고, 이듬해 1월에 펴냈다. 역시 처음 번역에 오류가 많아 이를 바로잡아 2012년에 전자책으로도 펴낸 바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없는 것은 바로 10군데 63장 때문이며, 이의 친필 여부를 속앓이로 오래 낑낑대다가 이제야 세상에 드러내본다.

 

그리고 우리는 외래어 ‘리더십’을 늘 ‘지휘통솔’로 알아왔으며, 순수한 한글로는 없는 줄로만 알았다. 장구한 반만년 역사 속에 훈민정음 28자로 된 말이 무어냐고 여러 교수들에게 물었어도 겨우 하는 말씀이 ‘지도력’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자말이다. 우리말로 ‘휫손’이 있다. 이 말은 2003년 말에 박사학위 논문 심사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질문하였다가 덜미잡힌 꼴이 되었지만, 『국어대사전』(삼성문화사, 1992)의 3226페이지를 맨 첫 장부터 매일 10장씩 뒤져서 1년 끝에 찾아낸 결실이다. 그제야 다시 박사학위 논문심사 때에 이 사실을 밝혔더니 심사위원들께서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리더십의 발견 충무공 리순신의 휫손』(충무공리더십센터, 2007)에 공개한 뒤로 이제는 공감에다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무척 많아지고 있다. 이 ‘휫손’의 사전적 설명이 ‘리더십’보다 더 구체적임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는 어떤 최초의 연구와 그 창작물의 실용화이며, 이런 다양한 문화가 발달해야 문명도 융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휫손의 문화는 있어도 휫손 문명은 거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리순신 연구는 칭찬 일색의 맹목적으로 영웅화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세계적 영웅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탁월한 전략가요, 전술가요, 영웅이니 성웅이니, 군신(軍神)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비판을 거듭함으로써 교훈삼으며 존중하고 존경하고 흠모할 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먼저 사실을 확인하라. 그 다음에 그 사실에서 결론을 끌어내라”라고 주장했던 현장 중심의 실증주의자들의 본심을 이제 알 것만 같다. 그 사실 확인이 인위적 의도가 작용되면 엄청난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난중일기』의 서지학적 고찰”은, 누 떼가 건너야 할 마라(Mara) 강을 뛰어들기를 머뭇거릴 때 숨어있는 악어의 공격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뛰어드는 그 ‘첫 번째 누(First-gnu)’처럼, 리순신의 아킬레스 건을 먼저 다듬어보며, 진실의 한 단면을 본다. 이 아킬레스 건이 진심으로 영웅사관에서 벗어나 리순신을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생각하며 교훈삼고서 참되게 흠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c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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