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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사의 흐름을 보면서 / 최두환

잊지 않겠다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제언
등록날짜 [ 2019년01월30일 09시21분 ]

[최두환 칼럼]

한국사의 흐름을 보면서

 


한국사를 똑바로 알기 위하여 한국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 흐름이 어때서라고 할지도 모른다. 글월이 길지만 한꺼번에 적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는 그 정체성을 앓고 있다. 당연히 그 한국사를 배우는 우리도 정체성에 단일민족과 다민족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에 처음부터 다문화 가족 문화로서 형성되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문헌상족보의 나와 기록부속호적의 나와 현실속현재 관계의 나가 동일체인지 검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명칭에서 조선(朝鮮) 대한(大韓) 진(震) 청구(靑丘) 동국(東國) 해동(海東) 대동(大東) 코레아(Corea‧Korea‧Cauly‧Corai)라고들 한다고 해서가 아니다. 단일민족 단군의 자손들이라고 해서도 아니다.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없지는 않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나라가 과연 어디이며, 얼마 크기의 강역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삶의 터전이고 애환이 서려있고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암 박은식(朴殷植‧1859~1925)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는 ‘중국 일대와 노령의 한인사회는 물론 국내에까지 전파되어 국내외 한인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1917년에는 하와이에서 순한글로 번역, 간행되어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p.9)고 하여, 이 때문에 ‘이에 당황한 일제는 그 대응책으로 1916년 일제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로 개칭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의 편찬을 서둘렀다.’(p.10)고 했지만, 정작 그 본문에는 조선의 위치와 지리상의 대강에서 “됴션은 아시아대륙 동경션 一百二十도로 三十도와 북위션 三十도와 四十五도 즁간에 동남으로 돌연히나온 반도국이라”(p.1)고 하여 현재 한반도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조선의 강역과는 별도로 한반도를 조선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략에 빠진 것이며, 일본에게는 이를 적극 이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조선일보』 학예란(學藝欄)에 연재했는데, 『주석(註釋)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83)에서는 “대개 朝鮮族이 최초에 西方 파미르 고원 혹 蒙古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東方으로 나와 不咸山을 明月이 출입하는 곳”(p.104)으로 보았고, “朝鮮文化의 원시 「수두」의 발원이 거의 松花江畔의 哈爾濱은 그 古名이 扶餘”(p.106)라고 하여 그 터전이 현재 하얼빈을 포함한 백두산 중심의 한반도였음을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그 이튿날 10월 15일부터 12월 3일까지, 이듬해 1932년 5월 27일부터 31일까지 41회에 걸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단재는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했다가 5월에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따렌(大連)으로 이송되어 1930년 5월에 따렌지방법원에서 10년형의 징역을 선고받고 려순감옥(旅順監獄)으로 옮겨져 복역하다가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이것은 단재가 옥중에서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거나, 집필했던 것을 신문에 연재한 것이 되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일본인의 작품이면 가능할지라도 온통 단재의 이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여서 그 내용을 믿거나 납득하기 참으로 남감하다.

 

자산 안확(安廓‧1886~1946)은 독립운동가로서 마산지방의 3‧1운동을 주동하는 역할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는데,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1923)를 짓고, 「조선인(朝鮮人)의 민족성(民族性)」이란 글에서 “한朝鮮人은本來白頭山을中心으로삼고半島와滿洲大野에住居하매”(2집, p.151)라고 함으로서 그가 독립하고자 했던 터전이 한반도였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비록 그가 ‘거의 혼자서 국학 탐구’라고 했지만, 결국 그가 ‘1914년 무렵 일본에 건너가 두어해 유학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일본식민사관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최남선(1890~1957)은 그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몸담았던 원죄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그는 1937년 9월에 『조선상식(朝鮮常識)』을 펴내면서 ‘강토편(疆土編)’에다 백두산 남쪽으로 ‘조선팔도(朝鮮八道)’를 설명했고, 해방되자, 1946년 6월에는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는 지리를 “조선은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북으로부터 남을 향하여 젖꼭지처럼 매달린 반도”라고 했는데, 1948년 4월에는 『조선상식지리(朝鮮常識地理)』에서는 역시 조선의 위치를 여전히 아시아 대륙의 동변(東邊)에 있는 “반도의 길이는 三천리”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삼국지』「위서」 동이전을 들먹이며, “方可四千里”, 즉 사방 4000리를 인용하였으며, “조선을 ‘東洋의 발칸’이라고 지목하는 말”에 이어 “조선이 그 대륙 동방에 있는 자연지리상 위치에 인하여, 항상 민족 起蹶(기궐)‧세력 전환의 대목마다 심각한 영향을 받아온 역사”라는 말을 끄집어냈다. 이러한 까닭에는 1904년에 일본 도쿄부립 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다닌 적이 있고,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한 적도 있으며, 비록 둘 다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곳에서 배웠던 것들이 끝내 손진태(1900~1950)납북의 『한국민족사개론(韓國民族史槪論)』(1948)에는 제1장 첫줄에 “우리 民族이 어느 때로부터 이 半島에서 生活을 營爲 … 또 어떠한 過程을 밟아서 今日의 民族을 形成하게 되었을까.”(p.13) 하면서 연구했듯이, 여느 사람들처럼 조선을 한반도에 가두고 말았다.

 

위당 정인보(1893~1950납북)는 1933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8일까지 3년 7개월 동안 『5천년간 조선의 얼』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는데, “단군은 백두산과 송화강을 터전으로 잡고 조선을 만드셨으니, 조선민족의 여러 갈래는 모두 단군”(p.21)이라 했고, “조선의 판도를 살펴보면, 지금의 조선 이외에도 개원(開原) 이북, 흥경(興京) 이동과 지금의 동북삼성(東北三省/길림성‧봉천성‧흑룡강성)을 모두 포함한 지역으로 중국 본토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았다.”(p.45)고 했다. 이것은 결국 한반도와 그 북쪽 지역을 가리킬 따름이다. 마치 1989년에 이병도와 최태영 공저의 『한국 상고사 입문』(p.23)에서 “고조선의 판도를 다시 요약하면, 압록과 두만, …”이라는 글을 그대로 읽는 것 같다.

 

천관우(1925∼1991)는 1971년에 《월간신동아(月刊新東亞)》에 5회에 걸쳐 연재한 한국사의 쟁점들을 묶어 『한국상고사(韓國上古史)의 쟁점(爭點)』을 펴냈는데, 국사의 연구방법에서 “假說이라는 前提下에서라도 되도록 거시적으로 우리 역사를 파악”할 것을 요구했고, “지나친 國粹的인 自尊은 排除되고 냉철한 科學的인 입장이 견지”하였다고는 하지만, “삼국형성 이전의 한반도 및 그 주변”을 고조선의 터전으로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독서신문사에서는 1975년 당시에 한국사학계를 주도하는 40여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1972년에 1년 동안 연재했던 각 분야에서 “우리 자체의 문제와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어떻게 탈피하고 극복하는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국사(韓國史)의 재조명(再照明)』이란 이름으로 밝혔지만, 56편에 이르는 이슈들은 과히 조선의 정체성을 다루는 문제라고 보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지리적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삼국사기」부터 실린 『조선사』로 꾸민 한반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통사』(1958)도 ‘한반도/조선반도’라는 말은 없지만, “고조선의 소국들은 서북조선에서 오늘의 중국 만리장성 계선[경계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p.45)고 하면서 결국 한반도가 조선의 터전으로 전개한 것은 식민사관의 탈피가 아니라, 그 연속선상에서 단지 “조선혁명을 위하여 조선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p.540)고 해설에서 밝혔듯이, 역사를 완전히 정치도구화로 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홍이섭(1914∼1974)이 1964년부터 고민하며 1968년에 정리한 『한국사(韓國史)의 방법(方法)』에서 “역사의식의 문제와 식민시대의 민족의식”을 다룬 내용에 비하여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최남선의 『조선역사』(1928/1946)와 일본인이 간행한 『朝鮮史講座(조선사강좌)』(1923)를 비교하고, 이병도의 『국사대관』과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의 『朝鮮史槪說(조선사개설)』를 서로 비교하여 무엇이 문제인지를 지적한 것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것이다.

(pp.27~29)

 

그러나 이 또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종사했던 “李能和先生의 「朝鮮基督敎史及外交史」”를 부록으로 다룸으로서 “민족적인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마저 끝내 한반도에 갇힌 “李氏朝鮮”을(pp.444~450) 그대로 담아내며 스스로 식민사관에 굴복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찌기 淺見倫太郞(아사미 린타로‧1869~1943)의 通史的인 「朝鮮法制史稿」는 우리 法制史의 최초의 구성으로써 아직까지 유일한 것으로, … 「半島에 있어 李朝 最後의 學者로써 丁若鏞을 지닌 것은 表章할만 하며, 半島의 法制를 생각함에 있어 丁若鏞의 書로서서 가장 완전한 것이라 하겠다.」(淺見, 法制史稿, 二四八面) 하였음에서, 오늘 우리들은 이러한 비판을 그대로 近世 朝鮮行政硏究로 돌려서 같이 볼 수 있다.”(pp.49~50)고 함으로써 그 내면에 식민사관이 그대로 녹아있음을 볼 수 있다.

 

2000년까지의 우리나라의 사관을 대표할 만한 글로는 이장희의 『근세한국사논고(近世朝鮮史論攷)』에서 보면, ‘조선후기 실학자의 역사인식과 문화이해의 근대적 성향’을 다루면서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을 인용하면서 “우리나라 국토가 기껏해야 東西 6백리에 미치지 못하고, 南北이 수천리에 불과”하다는 것에 비중을 두고, 다산 정약용의 중국과 동국을 구분하는 말을 인용하여 “우리나라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國史의 獨自性의 認識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조선의 강역은 끝내 한반도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동안 단절되었던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에 따라 다양한 정보를 만나게 됨으로써 『환단고기』 등을 중심으로 다물민족운동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자극하여 임승국‧주관중의 『다물의 역사와 미래』(다물 : 1991)에서는 한반도 강역에서 두만강 북쪽으로 길쭉하게 더 넓힌 정도에 그치는 지도를 보이면서(p.112) 진실된 역사연구에는 도리어 정체되었고,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은 『민족사상의 정통과 역사』(한뿌리, 1992)를 펴내면서도 “우리의 옛책인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을 고대사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우리 한겨레인 배달겨레가 흑룡강에서 한밝산에 이르는 사이 땅을 모두 차지하고 살았음을 중국책들에서도 밝혀져 있다.”는 한반도 중심의 논지에서 그쳤다.

 

그리고 언어학에 정통한 정연규1932~현재의 『한겨레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한국문화사, 2008)에서는 “마고(麻姑)가 도읍한 파미르고원, 환인이 도읍했다고 추정되는 천산산맥, 단군이 도읍했다고 추정되는 알타이 산맥의 지대”를(p.26) 언급하면서 상고조선의 뿌리를 한반도 백두산에서 크게 이동시켰지만, 역시 “조선족이 57~18B.C.년에 동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성립되었다.”(p.153)고 서술함으로써 조선의 강역은 도돌이표 한반도가 되어버렸다.

 

민족사에 심취한 안경전은 “지난 30년 동안 『환단고기』(2012)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중국 일본 이집트 중동 유럽 북남미 등 지구촌 각지의 역사 현장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2012년 6월 드디어 『환단고기』 완역본을 간행하였다.”고 출간 의의를 밝혔는데, 7세 환인시대 3301년간 환국(桓國)의 터전은 중앙아시아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18세 환웅시대 1565년간의 터전은 극동아시아 한반도 북쪽, 47세 단군시대 2096년간의 터전은 백두산 주변에서 남쪽으로 부여를 비롯하여 그 뒤에는 한반도에 삼한 삼국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나라들이 존재한 것으로 지도에 보이며(p.172) 풀이하였다. 진일보한 듯하지만, 위의 정연규의 해석보다 단군의 터전이 동쪽으로 더 치우쳐 있어 도리어 과거로 회귀한 셈이다.

 

이렇게 강단의 정통학자든, 재야학자든, 식민사관이든, 민족사관이든, 이 땅에서의 연구자들은 조선의 강역‧판도에 관하여 한반도 중심과 중앙아시아 중심으로 의견 또는 해석을 전혀 달리하고 있어 ‘우리’라는 정체성에 상당한 혼돈과 충격을 주고 있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디의 사료 속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그리고 한대와 열대까지 포함하여 지구전반구로써 또 다른 해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학의 도전이 더 발전되지 못하는 까닭은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탐구심과 지적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서양학문에 점점 더 길들여지면서도 정작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 Wells‧1866~1946)의 『A Short History of the World세계문화사』(1922)에서 “1900년까지 반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전 아프리카의 지도를 작성하고, 그것을 탐험하고 추산했으며, 또한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분할했다. … 아프리카 지도를 유럽의 빛깔로 황급히 칠해버리는 것을 세계문제의 항구적인 해결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역사가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19세기 유럽인의 머리에는 천박한 역사적인 배경밖에 없었고, 시대를 꿰뚫는 비판의식이 없었다.”(pp.305~306)고 한 내용을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quer‧1910~1990)와 존 페어뱅크(John K. Fairbank‧1907~1991)가 지은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1958)을 전해종과 고병익이 번역하여 펴낸 『동양문화사(東洋文化社)』(1964)에서 “韓國의 地名의 대부분은 발음은 약간 다르지마는 한자로 적어놓으면 中國의 地名과 구별이 안 된다.”(p.506)거나, “朝鮮半島의 南半部는 「韓」이라고 불리던 部族들이 살고 있었는데, 현재의 大韓民國의 명칭은 역에서 유래하는 것이다.”(p.518)고 서술되어 “1939년부터 시작하여 1947년 이래로 하바드대학의 「교양과목 계획」에 따라 강좌내용을 정리”된 것이라 온 세계 젊은 학생들에게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사관과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을 교육함으로써 자연스레 식민사관에다 사고의 방식을 묶어놓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의 학자로서 조좌호(1917~1991)는 『세계문화사』(1952)와 『동양사대관』(1955)에서 “朝鮮半島에서는 新羅가 亡하고 高麗가 일어나고”(p.308)라고 한데서 보듯이 그 내용이 하바드대학 강좌내용을 똑같이 듣는 것 같다.

 

현재 여느 대학에서 많이 교육되는 교재로서 신채식의 『동양사개론』(1993)에서는 ‘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한지도 20여년’의 경력을 담은 것임에도 그 내용에는 현재의 중국대륙을 전통적으로 중국으로, 한반도를 조선, 일본렬도를 일본으로 지도에 그려놓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隋의 위력에 맞서 돌궐, 말갈 등과 연합하여 隋에 대항하였으므로, 隋는 고구려를 정벌하게 되었다.”(p.294)는 식민사관의 틀에서 의심의 여지도 없이 역사학적 발전의 변화가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 편에서 펴낸 『한국사 강의』(1989)에서는 책머리에서 “한국사교육은 국정(國定)이라는 획일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학생들은 민족자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민주시민이 아니라, 안보와 반공이라는 분단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소시민으로 교육되었다. … 따라서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을 지향하는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는 일차적으로 한국사 강의안의 공동편찬요구로 나타났다.”고 하면서 도리어 국사가 ‘민족자주와 통일’의 방편으로 전락하였으며, 정작 강역의 문제는 다루지 않고, “고조선은 북방계통인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을 기본주민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들 예족과 맥족은 한반도 서북부와 남만주의 요동‧요서 일대를 포괄하는 발해연안에 일찍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p.69)고 하여 조선의 터전은 기존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전혀 변함이 없고, 민중과 농민이 부각된 민족주의운동을 중심에 두고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입장에서의 역사연구’와 ‘획일적 틀 안’에서의 새로운 도전적 모색이라면 방대한 사료를 더 섭렵하고 분석하면서 거시적 학문 탐구로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c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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