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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오로(伊吾盧) 전투'의 진실 / 최두환

등록날짜 [ 2019년02월14일 12시16분 ]

[최두환 칼럼]

'이오로(伊吾盧) 전투'의 진실 

 


"이오로 전투"가 조선사, 아니 한국사에 나오기는 한가?

맞다. 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통상 신채식의『동양사개론』에 "녀진족은 건주(建州)·해서(海西)·야인(野人)의 3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누루하치는 먼저 가장 남쪽에 거주하는 건주녀진 부족을 장악한 후에 나머지 부족을 통합하여 1616년에 後金(뒷날의 청)을 건국하였다."고 한 것을 익히고 있거나, 신룡철 등 14명이 지은『東洋의 歷史와 文化』에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야인녀진(野人女眞),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해서녀진(海西女眞), 무단강(牧丹江) 유역의 건주녀진(建州女眞)으로 나눈다."고 한 지식에서 그냥 우리는 한국사와 상관이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역사는 상상의 기억 속에서 맴돌고 있을 때는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 상상을 펼쳐 지도 위에 새로이 그려놓고, 경찰·검찰의 수사처럼, 지리적 공간으로 추적해 가면, 그것은 과거가 현실로 다가와 현재와의 대화에 맞닥뜨려지게 된다. 그러면 그 현실 속의 수사를 그만둘 것인가? 수사망을 더 넓힐 것인가?


그런데 이런 박진감 넘치고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에도 우리가 좀더 지식을 넓힌 것이라고 한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겨우 "성종 22년(1491)에도 許琮을 시켜 江 바깥의 女眞을 소탕하였다."[李鉉淙,『韓國의 歷史』]는 것뿐이며, 더 이상의 설명도 없고, 더 이상 다루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들은 더 이상 알고 있지도 않다.


이런 정도의 지식이『성종실록』권255 성종22년(1491) 7월 4일에 실린 오랑캐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인 것에 대하여 어떤 그 문제점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면 조선의 강역을 매우 서쪽으로 옮겨서 아시아로 넓혀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 오랑캐를 무찌를 군사들의 행동 목표 지명이 이오로(伊吾盧)이다. 이곳은 지금의 신강성 동부 이주(伊州)·이오현(伊吾縣)이라고도 하는데,《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보면, 지금의 신강성 합밀현(哈密縣)이다. 그 쪽 발음의 하미(哈密)는 천산산맥의 동쪽 끝 투르판[吐魯番)·류성(柳城: 柳中)의 동쪽, 돈황(敦煌)의 북쪽인 북위 42.8도 동경 93.5도이다. 한반도에서는 너무도 멀다.


둘째, 그 군사 동원 지역이 조선 8도 가운데서 실로 전국적이랄 수 있는 6도의 최고 지휘관 12명, 즉 개성부류수·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충청도병마사·전라도관찰사·전라도병마사·경상도관찰사·경상좌도병마사·경상우도병마사·영안남도절도사·영안북도절도사에게 임금이 명령을 내렸다. 영안도는 지금의 평안도다. 다시 말하자면 전국 동원령이었다.


셋째, 그 동원된 병력이 2만 명이라는데, 도원수는 영안도 관찰사 허종(許琮: 1434∼1494), 부원수 성준(成俊)·리계동(李季仝)을 지휘하여 1491년 10월에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오랑캐 소굴[窟穴]을 공격하여 무찔러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넷째, 군사동원의 명분을 과거의 사례에서 찾아 '제왕의 성덕'과 '성인의 의병'임을 강조하였다. 즉 주나라 선왕 때의 남만의 형주[蠻荊]에 대한 채기의 군대, 당나라 태종 때의 투르크왕 힐리에 대한 막북(漠北)을 토벌, 1419년(세종 원년 기해)의 왜구에 대한 대마도 동방정벌(東方征伐), 1433년(세종 15년 계축)의 건주야인 리만주(李滿住)에 대한 서방정벌(西方征伐), 1460년(세조 6년 경진)의 모련위(毛憐衛)야인 서방정벌이라는 5차례의 군사동원과 정벌을 언급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명분은 백성과 종묘사직을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수·당 나라만이 아니라, 조선초기 15세기 초에 3차례(1419/1433/1460)의 정벌사건이 성종 때에 와서도 서로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말한 것이다.


다섯째, 특히 야인들의 침범의 사례를 세부적으로 언급하면서 북쪽 오랑캐[北虜]가 1490년 무이보(撫夷堡) 침범, 1491년 조산보(造山堡) 침범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성종이 직접 군사를 동원하여 무찌르겠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이오로 전투를 위한 동원지역 6도의 199고을에서 2만 명을 13개로 구분하여 모두 함경도 길성(吉城)에 집결시켰다.

 

일곱째, 병력의 이동소요 기간이 최소 16일간(전라도 일부)·17일간(강원도)에서 최대 39일간(전라도 일부 및 경상도)으로 평군 30일간 걸리는 거리였다. 이것은 전라도 무안·함평(16일간 소요)이 지리적으로 옥구·김제(35일간 소요)보다 상대적으로 이오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전자는 전라남도에 있고, 후자는 전라북도에 있어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남쪽 멀리에 있어 이런 내용은 한반도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군사동원의 목표지 "이오로"는 사막의 언저리에 있으며, 서북쪽엔 중가리아(Dzungaria) 분지가 있고, 서남쪽엔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인데, 정남 쪽엔 사주(沙州)·돈황(燉煌)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말하고 알고 있는, 전국 6개도의 2만 명을 동원하여 집결지로 삼은 함경도 길성(吉城)은 어딘가? 이곳이 한반도라면 북위 41도, 동경 129.5도 길주(吉州)이다.『신증 동국여지승람』권50에 보면, "본디 고구려 땅이고, 吉州·海洋"이라 했다.


일단 한반도 길주(북위 41도,  동경 129.5도)에서 신강성 하미(북위 42.8도,  동경 93.5도)와의 거리는 지도 위에서 직선 거리가 3000㎞(=7936.5리)로서 산길을 고려하여 +20%한다면, 3600㎞(=9523.8리), 즉 1만리나 되어 너무 너무 멀다. 이런 거리로서는 병력이동·군량보급·숙영지 등등의 군사작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이 조선의 2만의 군사들이 집결한 길성인 것이다. 이 지역엔 위구르(Uighur: 回紇)가 있는 곳이고, 서쪽엔 투르크족이 있으며, 북쪽엔 사타부(沙陀部)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투르크족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녀진족이라야 될 것 같다. 이 지역의 부족들이 조선에 침범해와서 약탈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북동해안에 있는 함경도 길주의 서북쪽에 이오로(=하미)가 있든지, 신강성 하미[哈密] 근처에 길성(=길주)가 있든지, 이 둘 중에 하나여야 지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길성의 지명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서 바로 "海洋"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바다[海]"이다.


이 "海"로서의 지리적 상황이 한반도 북동부 지역에서는 일단은 없다. 그렇다면 이오(伊吾), 즉 하미[哈密] 주변에는 어떤가?『중국력사지도집』(제5책 隋唐時期, p. 63-64)에 보면, 하미의 서쪽, 류중(柳中)의 남쪽에 "大沙海/大海道/瀚海"[북위 42도, 동경 90도  중심의 넓은 사막지대와 호수]가 있다. 이 지역은 옛날에 엄청나게 비옥했단다. 비록 대륙의 중심이지만, "바다[海]"라는 말이 '길성'의 '海洋'에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니마거 우디거 등의 오랑캐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이보다 훨씬 더 먼 서쪽으로 1500㎞나 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반란은 이미 6달 전부터 동태가 파악되었으며, 다카르[Dakhar: 都骨(도골)]·야르칸트[Yarkand: 沙車/莎車(Socho)] 등 칠성 우디거[七姓兀狄哈] 800명 남짓이 무이보(撫夷堡)에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했고, 니마거 우디거[尼麻車兀狄哈] 실보개[時乙甫介]가 그들 무리 300명 남짓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에 따라 영안북도 절도사 윤말손(尹末孫)이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급히 여섯 진[六鎭: 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鐘城)·회녕(會寧)·부녕(富寧)·경흥(慶興)]을 향하여 순행하며 변고에 대처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심각하게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섯 진[六鎭]의 공통점은『신증 동국여지승람』권50에 보면, "아무하(阿木河·斡木河·五音會)"라는 강의 유역에 있는 고을이다. 이 아무하는『중국사』에서는 같은 소리로 "阿母河·阿姆河·烏滸河"라고도 하는데, 파미르고원 남쪽 곤륜산 서쪽 끝에서 서쪽으로 흘러 아랄해[Aral Sea/鹽海]로 들어가는 강, 곧 아무 다르여(Amu Dar'ya)이다.


여기에 영안북도 절도사가 이 지역의 오랑캐들의 변란에 대처하고 있었으니, 영안도 관찰사가 이를 지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숫제 이오로 전투의 발원지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지역이 된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100년째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0년 전에 있었던 이 1491년의 조선의 '이오로 전투'에 관하여 교과서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조선왕조실록』에 꼭 한번 실려 있는 성종 22년(1491) 7월 4일에 병력이동의 군사전략을 언급한 사건이어서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강효석(姜斅錫: 1869∼1946)이 지은『동국전란사』(외란편)에서는 "성종 22년 허종의 여진토벌에 6도 군사"를 다루었지만, 정작 중요한 지명 "伊吾"는 빠져 있으며, 관찰사 "허종의 군대가 출동하자 니마거 우디거(尼麻車兀狄哈)뿐만 아니라, 건주삼위(建州三衛)의 녀진족 모두 두려워서 피하였으므로, 허종은 한번도 교전을 하지 않고 개선하였다."고 하였으니, 싸워보지도 않고 이긴 무혈개선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도원수 허종의 군사 2만 명의 위세에 눌려 북로[北虜]들이 달아나 버렸으니, 더 이상 다루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도 무엇보다 지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한반도가 조선이란 력사에서는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이것은『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어진 가장 알기 쉬운 전투로서 가장 서쪽에 있는 중앙아시아 속의 조선의 오랑캐 반란진압 사건이다.


조선의 대륙 속의 오랑캐 진압사건을 오해할까봐 따로 있을 故事로서의 "伊吾"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자.

 

(1) 연주·운주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이오로'의 북쪽에서 칼을 어루만진다.[唾手燕雲 鳴劍伊吾之北]
(2) 아직 한 사람도 청해에 활을 걸고, '이오로'에서 칼을 어루만지는 뜻을 가졌단 말을 듣지 못했다.[未聞有一人 掛弓靑海 鳴劍伊吾之志者]

 

이렇게 "이오"에 관한 말이 딱 두 번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鳴劍伊吾"(명검이오)이다. 이것은 역시 "국방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나타낸 말인데, 직접적인 지명과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종이 말한 "憤於伊吾"[이오로에서 분풀이하다]는 바로 그 지명에 직접 말한 것이며, 그곳에 대한 조치였음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력사적 사건을 학계에서 어떤 학자도 다루지 않고 내버려두면, 조선의 어떤 지역도 조선의 것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분명 신강성 이오로 전투를 위한 조선의 전국 199개 고을의 병력 동원과 그 작전은 조선 강역 안에서의 오랑캐 토벌 작전이었다.


그렇다면 알타이산맥의 남서쪽이고, 신강성 우르무치[烏魯木齊]의 동쪽 이오로[哈密] 지역에 대하여《중국사》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1491년[孝宗4] 8월 15일에 황제의 아우 우지(祐 )를 수왕(壽王)으로, 우팽(祐木亨)을 여왕(汝王)으로, 우순(祐橓)을 경왕(涇王)으로, 우추(祐樞)를 영왕(榮王)으로, 우개(祐楷)를 신왕(申王)으로 봉했다. … 12월 22일에 투르판[土魯番: 吐魯番]에서 합밀(哈密: 하미/이오로)과 금도장[金印]을 가지고 귀순하였다.[『明史』卷15 本紀15 孝宗]

 

이 1491년을 전후하여 황제가 누구에게도 제후로 봉하지 않았고, 어디에 반란이 일어났거나, 어디를 공격했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직 투르판 지역의 제후가 하미[哈密], 즉 이오로(伊吾盧)와 금도장[金印]을 가지고 와서 귀순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전투를 벌였으며, 항복하여 그 지역에 대한 지휘권을 도로 바친다는 뜻이다.


이 이오로 전투에 조선의 전국 군사들이 출발하는 날짜가 8월 9일부터 9월 8일 사이이고, 영안도(=평안도) 지역은 도원수의 별도의 지시에 따른다고 했고, 함경도 지역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때 황제의 아우 5명, 우지·우팽·우순·우추·우개가 8월 15일에 제후로 임명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명사』는 그 기록의 현상으로 보아, 분명『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하여 엮은 책에 지나지 않으며,『조선왕조실록』또한 상당한 내용들이 한반도에 맞추어져 있지만, 많은 내용들이 대륙 속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 최두환  

경영학박사. 동양사 문학박사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c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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