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명 칼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아테네올림픽 때 마라톤경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한다. 나는 그 경기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다. 브라질의 리마 선수가 37킬로미터 지점까지 줄곧 선두에서 독주했고, 뛰는 모습으로 보아서 그의 우승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런데 관중 하나가 1위로 달리고 있는 리마 선수한테 덤벼들어 길가로 밀어붙이는 어이없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힘겹게 뛰고 있는 마라톤 선수한테는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보폭의 리듬이 깨어지고, 에너지도 급격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보통 선수였다면 아마 길가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리마는 사력을 다해 뛰었고, 가까스로 3위로 골인했다. 비록 3위로 처지기는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뛴 리마 선수의 투혼은 마라톤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믿는다.
나는 10여 년 전에 잠실에서 살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강 둔치에 나갔는데, 아주 가끔 낯익은 마라톤 선수를 목격했다. 황영조 선수였다. 어떤 때는 두세 명이 어울려 함께 뛰기도 했는데, 대개는 황영조 선수 혼자 외롭게 뛰는 모습을 보았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 때,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나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그의 대답 중에 “훈련 중에 그만 물에 빠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훈련이 얼마나 힘겨웠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가 물에 빠져 죽고 싶었던 그 ‘물’이 한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올림픽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을 보면 어떤 종목의 경기이든 우승자는 대개 기진맥진해 있게 마련이다. 황영조 선수도 골인 지점을 통과한 후 몇 발짝 더 가지 못하고 운동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황영조 선수가 그랬다. “태극기를 높이 들고 흔들면서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못 돈 것이 아쉽다.”고.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만약 그런 여력을 염두에 두고 뛰었더라면 그가 과연 그 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었을까. 골인 지점을 지나자마자 쓰러져 버릴 정도로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때 이를 악물고, 바로 뒤따라오는 일본 선수를 힐끔힐끔 돌아다보던, 혼신의 힘을 다해 뛰던 황영조 선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문인들은 어떤가. 우리 문인들은 흔히 ‘뼈를 깎는 고통’이니 ‘피를 말리는 작업’이니 하면서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를 비유로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마라톤 선수나 글을 쓰는 문인이나 ‘혼자’라는 사실은 같다. 그렇지만 우리 문인이 리마나 황영조 선수처럼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가면서 글을 쓰는 문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쓰다가 적당히 만족해 버린 작품과 고치고 또 고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쓴 작품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마련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황순원 선생께서 그런 모범을 보여 주셨다.
나는 1978년 5월부터 1983년 5월까지 <현대문학>에서 근무했다. 그 무렵 황순원 선생님은 <현대문학>에 연재소설을 쓰셨다. 지금과 달라서 그때는 활판인쇄였고, 교정을 최소한 3번은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3번의 교정을 직접 보셨는데, 3번 다 새빨갛게 고치셨다. 말이 고쳤다는 것이지 사실은 새로 쓴 원고나 다름없었다. 교정지를 보고 질려 버린 인쇄공이 매번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선생님의 교정지를 들여다볼 때마다 나도 어지간히 질려 버릴 정도였는데, 미안해서 그랬을까, 선생님께서 사무실 부근 통닭집으로 다른 사람 몰래 불러내어 사 주시던 통닭 맛이 새삼 그립다. 교정지 여백이 모자라면 다른 종이를 덧붙여 가면서, 리마 선수나 황영조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시던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 정종명
소설가. 前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계간문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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