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들의 수작(秀作)원숙함 돋보여

시간의 빈틈 사이로 참 괜찮은 앤솔러지 신권 한 권이 도착했다

나는 늘 루틴(routine)한 일상에 몸이 묶여있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말을 타고 실크로드를 달린다. 가끔은 마음속 불순물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개울물에 맨발을 담그기도 하고.

이렇게 소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어 부랴부랴 ‘詩의 끈을 풀다’ 시집을 손에 들었다.

사실 내게는 삐걱거리는 일상의 틈으로 한 달에 몇 권씩 책이 배달된다. 그러나 몇 장 넘기다보면 맥이 빠져서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번엔 첫 페이지부터 뭔가 다르다.

지성의 샘(주간 이현실)에서 58명의 수작(秀作)들을 엮었기 때문일까.

파리채에 쫓겨난 파리/ 벽과 천장에 붙어/ 손을 씻는 걸까, 비는 걸까 …마경덕 시인(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시 –식탁의 버릇- 일부 발췌

봄을 물고 온 살랑바람에/ 좁쌀만 한 꽃들이 피었다…중략 …수캐들 거시기 닿은 곳마다/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불알꽃 이화인시인(현대시문학 등단)의 시 –개불알꽃-

오직 물로만 읽히는 세상/ 두 손으로 비누의 페이지를 넘긴다/ 애초에 그는 물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를 일/ 단단하게 보듬은 비밀이 한 겹씩 벗겨진다 …중략 원춘옥시인(글마루 회원)의 시 젖은 문장

당신이 걸어온 나날들이 길 위에서소금꽃을 피운다/ 이젠… 눈물보다 싱거워져 짜지 않은 자반고등어/ 어디에다 간을 맞출까 멀리 하늘만 바라본다 …중략 서공정숙(예술세계 등단) -고등어가 등장하는 시간 -일부

서둘러 꽃잔치 열자며 설레발치던/ 매화도 목련도 개나리도/ 만개한 꽃잎 파르르 떨면서/ 언 입술을 닫지 못한다 한상림시인(예술세계 등단)의 4월, -함박눈- 일부

음지에 납작납작 엎드려 /구걸하는 그림자로 살아본 사람만이/ 추억으로나 떠올려 보는/ 오묘하기 짝이 없는 그 맛 …중략 이현실시인(예술세계 등단) 시 –그늘의 맛- 일부

장미꽃의 향기가 장미의 땀 냄새이듯/ 발자국마다 발바닥마다 걸어온 만큼의 질량처럼/ 냄새에도 묵직한 집이 있다는 것을 …중략 조윤주시인(예술세계 등단)의 시 -땀 냄새, 집 한 채- 일부

그곳에 가보면 알 일이야/ 어떤 이유든/ 들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생각을 들고/ 거친 뱃길에 / 울렁증 노랗다 싶을 때 도작하는 그곳

… 최수지시인(예술세계 등단)의 시 –소매물도- 일부

58명의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을 모두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지성의 샘 주간인 이현실시인은 아이는/ 대지에서 뒹굴고/ 아버지는 대지에서 땀 흘리고/ 할아버지는 대지에 묻혀 있다. 중국 시인 짱커자의 시 [삼대]를 인용해 58인의 시 모두가 아름다운 앤솔러지라고 했다. 그렇다 앤솔러지(Anthology)의 어원이 꽃을 따서 모은 것이란 뜻이니 다양한 꽃들이 ‘시의 끈을 풀다’에 녹아 숨 쉰다.

시를 읽다보면 태양과 바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내 곁에 서성인다. 물론 그늘로 만든 돗자리는 덤이다. 인공의 불빛이 없어야 별이 보이듯, 시를 읽다보면 마음의 불순물은 사라지고 온전한 시간이 별이 되어 반짝인다. 삶이 바쁘고 퍽퍽할 때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지성의 샘 254쪽 15,000원

<조윤주 객원기자 >333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