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남부보훈지청 보훈과 서영란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협정일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 당시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타국에 와서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이날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했다. 하지만 유엔군 참전과 6․25전쟁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했고,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으로의 파병을 최종 결정했다. 이에 따라 6.25전쟁 당시 유엔회원국 16개국이 전투병력을, 6개국이 의료와 시설을 지원하며 우리나라를 도왔다.
1950년 7월 초, 미군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했다.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결사적으로 저지하며 맞섰고, 전 병력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집중시켰던 북한군은 무리한 작전으로 많은 손실을 입게 된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북한군의 군수품 공장을 파괴하고 전선을 공습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9월 15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됐고 미군과 국군은 인천 장악에 성공했다. 이 작전을 통해 전쟁 발발 3개월만인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혹한과 싸워가며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장진호 전투, 그리고 20만여 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 등 유엔군은 국군과 함께 불리하던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계속해서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대거 개입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1년이 지나자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한반도 문제는 군사적으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에 들어가게 되고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은 발발한 지 3년 1개월 만에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마무리됐다.
당시 6․25전쟁에서 총 4만여 명의 유엔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국가보훈처는 국내외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7월 27일 오전 10시,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을 거행한다.
이름도 위치도 몰랐던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무더위와 혹한을 견디며 싸웠던 유엔참전용사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기다리며 유해라도 발견되기를 바라는 가족들.
6․25전쟁 발발 69주년과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아 후손들을 위해 희생한 호국장병과 대의를 위해 희생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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