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주기 호국영웅 연제근 상사와 12인의 특공대원 추모식’이 지난 1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7묘역 앞에서 연 상사의 유족과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식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최소 규모로 진행됐으며, 국민의례 및 묵념을 시작으로 전공소개, 헌화 및 분향, 추모사, 유족대표 인사 등의 순으로 거행됐다.
故 연제근 상사는 경북 형산강 전투에서 도하작전이 번번이 실패하게 되자 자원해 본인 포함 13명의 돌격대를 조직, 1950년 9월 17일 수류탄만으로 무장하고 형산강을 도하해 적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부하 모두와 전사했다. 이는 아군의 성공적인 도하작전의 도화선이 됨으로써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공로로 평가되고 있다.
故 연제근 상사 공적
故 연제근 상사는 1930년 충북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에서 태어나 1943년 도안초등학교(16회)를 졸업하고 1948년 1월 국방경비대 제7보병사단 입대해 훈련을 받았으며 1949년 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 지리산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해 공비 9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2계급 특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채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낙동강과 포항 형산강까지 밀려 나라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 1950년 북한군 8월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동부전선의 청송지역으로 진출했던 북한군 12사단이 방향을 바꿔 경주방어의 요충인 기계를 점령하고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함으로써 아군 제3사단은 고립된 상황이었음으로 경주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포항시의 남쪽을 흐르는 형산강을 아군이 확보하지 못하면 포항을 적에게 아주 피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적의 입장에서는 일단 수중에 넣은 포항을 계속 차지하려면 이 형산강을 건너 그 남쪽까지 진출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또 형산강 남쪽은 영일군과 구룡반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경주를 노리는 적의 작전이 한결 쉬워지는 이점이 있고, 만약 인근의 영일 비행장을 적이 차지한다면 아군의 공군 출격을 저지하는 이점 또한 크기 때문에 형산강 지역은 피·아 쌍방 간 전략적 요충지로 포항 공방전의 최대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적은 형산강 도하작전을 서둘렀는데 제5사단과 제12사단, 유격부대인 제766부대를 필두로 하고 있었다.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는 포항만은 기어코 탈환해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였기 때문에 3개 독립부대를 투입해 적 제12사단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게 형산강을 막고자 했고, 이에 북한군은 영일비행장을 탈취해 경주의 동 측방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아군은 적의 진출을 막아냄과 동시에 포항 탈환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에 형산강 지역에서의 치열한 공방전을 피할 길이 없었다. 1950년 9월 16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된 이틀째인 이날 최전선의 상황은 급전하기 시작했다. 적은 이미 낙동강 전선 도처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형산강의 유일한 다리인 형산교를 돌파하려고 여러 날 시도하다 화력이 급격히 떨어졌을 때 “형산강을 도하해 포항을 탈환하라!”는 아군 3사단 공격명령이 형산강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22연대로 하달됐다. 이때 형산강 뚝 북한군 측에는 기관포 진지가 공고히 구축되어있어 아군의 도하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도하작전을 감행하기 곤란한 상황인 때 당시 제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 분대장이었던 연제근 이등중사는 분대원들과 의견을 모은 후 소대장에게 분대의 사전 도하돌격을 요청해 중대장의 승인을 얻고, 9월 17일 새벽 4시 아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대안상의 북한군 진지를 강타하는 순간 탄띠와 멜빵 가득히 수류탄을 찬 연제근 이등중사와 12명의 특공대원은 형산강 도하 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새벽의 어둠을 뚫고 가슴까지 차는 물살을 가르며 강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적진 가까이 전진하자 2정의 적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강북 대안에 다다랐을 때는 12명의 특공대원 중 9명이 전사해 3명만이 남았고 연제근 이등중사도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3발의 수류탄으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적탄에 쓰러지니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적의 기관총 진지가 파괴되고 10분후에 제22연대는 형산강을 넘어섰다. 연제근 이등중사와 분대원 12명의 목숨을 건 형산강 도하 통로 개척은 아군의 성공적인 도하작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된 것이었다. 1950년 12월 30일 이등중사는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1956년 10월 29일에는 무공포장이 추가로 추서됐다. 2000년 정부는 이등상사를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해 전쟁기념관의 6·25기념관에 동판사진으로 비치했으며, 2003년 1월 9일 호국인물로 선정해 전쟁기념관에서 현양행사를 거행했다. 2001년 연제근 영웅의 모교인 도안초등학교에 흉상이 건립되어 매년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2010년 6월 25일 포항시 해도근린공원에 2301명 전몰용사들의 위훈을 기리는 선양탑이 건립되면서 연제근상사와 분대원 12명의 군상을 건립해 같은해 9월 19일 군상 제막식을 가졌다. 또한 2007년 제3보병사단에도 고인의 흉상이 건립되었고 매년 추모식을 가지고 있으며, 육군본부에서는 근속 20년이상의 부사관들에 수여되던 호국헌신상을 지난 2011년부터 호국영웅 연제근상사의 숭고한 조국애를 기리는 뜻에서 제근상으로 명칭을 바꾸어 낙동강 전승 행사에서 시상해 오고 있다. 아울러 국방부에서는 9월 17일을 연제근의 날로 선정하기로 하고 이날 육, 해, 공군의 전 장병을 대상으로 故연제근 상사의 숭고한 조국애와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채홍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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