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시집 "나팔꽃 시인" 해설 / 양영길 문학박사
여린 정감의 물음 지평 - 백영옥의 시세계
ISBN 979-11- 86521-53-3 가격: 13,000원
1.
시를 쓰다 보면, 나약함이나 외로움에서 조금이나마 헤어날 수 있다. 시를 쓰다 보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고 아파했던 순간들이 되살아나기도 하지만 이를 희석하고 표백할 수 있는 물음을 스스로 찾게 되기도 한다.
시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움을 쓰게 마련이지만, 백영옥 시의 행간에는 연민의 정이 곳곳에 자리하면서 시적 역동이 일어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써 나가면서 자신이 겪었던 물음을 통하여 아픔을 삭여내고 있다.
존재 물음은 어둡고 방향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백 시인은 상실감이나 좌절감, 이루지 못한 꿈들을 시의 그릇에 담아내고 있다. 그 이루지 못한 꿈들이 시의 그릇에 담겨 세상에 나가게 되면 물음이 꾀하고 있는 그 이루지 못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앞선 이끎에 의한 정한은 과거 지향적이라고 하지만 시인은 그 아픔을 삭여 미래 지향적으로 물음을 열어 놓고 있다.
2.
시 쓰기는 무기력한 일상에 생동하는 에너지를 채워 넣을 수 있다. 물음이 향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시인은 또 다른 물음 지평을 풀어내고 있다.
더듬더듬 살아온 세상살이
한 줄 외로움이 뻗어 와도
두 팔 벌려
푸른 하늘을 안는다
시린 바람에도
보드라운 입술로 입맞춤하고
손을 흔들며
온몸으로 하늘을 반긴다
뙤약볕에 숨이 막혀도
이슬 머금은 아침을 기다리다
삭은 듯 거뭇한 가슴 잠재운다
살과 뼈, 오욕으로 물들어
허공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피멍든 가슴의 방황
하얀 나팔꽃 피어 노래한다
- 나팔꽃- 전문
“아득한 먼 곳에서부터 올 것 같은/ 아직 보이지 않는/ 가슴 일렁이는 기다림”, “갓난애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처럼/ 뜰락말락하는 눈과 오물거리는 입처럼/ 나무뿌리가 먼 발끝부터 꼬물락 거리고” “꼼질꼼질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면 “잊었던 꿈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2월에」)할 때쯤 시인이 ‘수채화’를 그리듯 나팔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바람의 수작”을 부려 “어질러진 꽃밭”, “덜컹대는 문소리/ 잉잉대는 전신주 울음소리”(「꽃밭」)를 지나 “모래알처럼 쏟아 놓았던/ 무수한 언어들의 속삭임을” “바다가 삼켰다가 토해 놓은/ 이야기”(「서우봉 앞 바다」)를 들으면서 “두 팔 벌려/ 푸른 하늘을 안”고, “더듬더듬 살아온 세상살이”에도 “입맞춤하고/ 손을 흔들며/ 온몸으로 하늘을 반기”면 “하얀 나팔꽃”이 시인의 아침을 노래 불렀다. “숨이 막혀도” “삭은 듯 거뭇한 가슴 잠재”워 주기도 했다.
그녀의 꿈을 모아 두던 곳
방을 도배하고 남은
도배지가 발려 있다.
비밀의 정원 같은
꽃무늬다
한쪽 면에는
에메랄드 보석 같은 육각의 무늬도 있다
한복집 하던
이모가 짓다 남은 한복 조각들
켜켜히 접어
궤짝 속에 뒀다가
비가 오는 날
창가로 돌려 앉힌 재봉틀에서
어머니의 손을 거친 작은 조각들
마술처럼 새로운 게 태어난다.
분홍색 고운 조각을 붙여
동생의 속바지를 만들었고
짧은 플레어스커트를 뚝딱
마술같이
눈앞에 내어놓았다
색색이 오려 붙여
촘촘히 박음질한
큼직하고 단단한 아버지의 베개
아버지 베개를 꼭 닮은
오빠의 작은 베개
우리들에겐 양옆으로 미역귀 같은 주름을 넣고
사탕 베개를 만들어내셨다
비밀처럼 간직해온 배냇저고리
비단 삼베는 늘 맨바닥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가 앓고 있는 골다공증처럼
좀이 쏠고 있는 궤짝
그녀의 기억들마저 점점 남루해 간다
-빛바랜 궤짝- 전문
“비밀처럼 간직해온 배냇저고리”가 “늘 맨바닥을 지키고 있”는 ‘빛바랜 궤짝’에는 어머니가 시인의 어린 시절 조각난 꿈들을 모아 두었다. ‘꽃무늬 잔뜩 그려진 도배지의 조각들’, ‘알록달록 꿈을 담은 한복 천 조각들’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거친 작은 조각들”은 시인에게 “마술처럼 새로운 게 태어”났다. “색색이 오려 붙여/ 촘촘히 박음질한/ 큼직하고 단단한 아버지의 베개”가 뚝딱 나오고 “우리들에겐 양옆으로 미역귀 같은 주름을 넣”은 “사탕 베개”가 “마술같이/ 눈앞에” 짜잔 나타났다. 백영옥 시인은 조각난 꿈으로부터 물음을 받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눈 위를 구른다.
풍파된 배가 뒤뚱대며 걸어와
눈 쌓인 숲에서 실신하고
까마귀 한 마리 까옥 까옥 울음 운다.
하얀 세상에
나뭇잎 떨어진
끝자락 마디마디
눈꽃으로 피어
하얀 면사포를 쓴
황홀한 세상이 펼쳐질 때
소리 지르고 싶은 환희가
죽었던 심장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
혼돈과 혼란의 시간에서
치욕과 오욕의 시간에서
머릿속을 하얗게 색칠해 놓고
다시 쓰는 순백의 시간을 맞이한다.
- 1100고지에서- 전문
“위로 쳐다볼수록 더 커지는 도깨비 몸뚱이/ 아래로 내려다볼수록 점점 작아지는 도깨비를/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고/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붙어 보자”던 지난 시간을 “대문앞 전봇대에/ 짚세기로 꽁꽁 묶어놓고” “뒤뚱 뒤뚱 갈지 자 걸음”(「도깨비불」)으로 걸어온 시간 속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눈 위를 구”르면 “풍파된 배가 뒤뚱대며 걸어”오고, “까마귀 한 마리 까옥 까옥 울음” 울면 “죽었던 심장을 다시 흔들어 깨”웠다. “혼돈과 혼란의 시간에서/ 치욕과 오욕의 시간에서/ 머릿속을 하얗게 색칠해 놓고/ 다시 쓰는 순백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시인에게 앞 선 이끎에 대한 물음은 늘 외로웠다.
3.
한은 풀려고 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출할 수도 없다. 그냥 삭이고 삭이다 보면 또 다른 물음들이 자리하게 된다.
시적 물음에서 찾아지는 이러한 ‘삭임’은 또 다른 물음을 낳고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치매만 하지 말고 죽었으면 했던
가련한 어머니
울타리 뛰어넘어 말 탄 사람들이 온단다.
하얀 적삼에 검은 치마 입은 아낙네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고,
애기 업은 아낙은
텃밭의 상추를 뜯고 있단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신발 자국 찍은
마루에 앉아 있고
저것 봐라 저것 봐라
안방 장롱 속에서 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늘 하던 고슬밥이 묽은 죽이 되었다.
가련한 어머니
치매만 하지 말고 살았으면 한다.
- 가련한 어머니- 전문
무화과 가지가 길게 뻗어 누워
칠성단을 품고 있다
뒤뜰 장독대에 가려져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로
늘 축축했던 곳
초가 처마에 기어 다니던 큰 구렁이
칠성단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스르르 사라져 버리면
밤새 뒤척이던 어머니 근심
따뜻한 햇볕이
도리도리 얹은 돌담을 덥히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듯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나는 구렁이가
초가삼간을 지켜준다고 하던 어머니
배곯던 가난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어머니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첫새벽
고든물 길어다가
흰 대접에 가득 부어
칠성단에 올리고
삐져나오는 새벽 기운 한데 모아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히던 어머니
자꾸만 굽어 가는 허리처럼
칠성단의 짚 무더기도
모로 드러눕기 시작하고
얕으막한 돌담 경계도 허물어져 간다
남아 있는 건
뒤뜰 한켠에서
허리 굽힌 채 동상처럼 서 있는
어머니 모습만
아스라이 영상으로 남는다
- 칠성단과 어머니-전문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첫새벽/ 고든물 길어다가/ 흰 대접에 가득 부어/ 칠성단에 올리고/ 삐져나오는 새벽 기운 한데 모아/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히던 어머니”. “늘 하던 고슬밥이 묽은 죽이 되”던 날 “가련한 어머니”는 시간을 거슬러 아픔의 현장으로 달려들었다.
“울타리 뛰어넘어 말 탄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하얀 적삼에 검은 치마 입은 아낙네들은/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했다. “애기 업은 아낙은/ 텃밭의 상추를 뜯고 있”다고 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신발 자국 찍은/ 마루에 앉아 있”다고 벌벌 떨기도 했다. “저것 봐라 저것 봐라/ 안방 장롱 속에서 물이 쏟아진다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치매만 하지 말고 죽었으면 했던” 어머니는.
“남아 있는 건// 뒤뜰 한켠에서/ 허리 굽힌 채 동상처럼 서 있는” “모습만/ 아스라이 영상으로 남”아 시인의 눈앞에 선연히 어른거린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면
목젖이 아파온다.
그러다 먼 산 한번 바라보면
눈물 한 방울 뚝
차가운 바람은
눈가로 번지는 눈물을 닦는다.
대추차를 끓이며
떠오르는 얼굴
오일장에서 수삼 몇 뿌리 사다가
넣고 끓여내던 어머니의 대추차
구만리 먼 곳에 계신 어머니
부엌의 일상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들 때면
으레히 부엌에는 5와트짜리 노란 전구를
밝혀 놓던
그 새벽
깜깜한 마당에
매일 밤 켜놓던
그 불빛
꺼지지 않은 한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꼿꼿이 서 있기를 바라며
오늘 대추차를 끓이다가
못내 그리워 시렷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 대추차를 끓이며- 전문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면/ 목젖이 아파”왔다. “먼 산 한번 바라보면/ 눈물 한 방울 뚝” “눈가로 번”졌다. “바다는/ 흰 치아를 내보이며/ 추위를 삼키고/ 바람을 삼키고/ 나를 삼키려고 외쳐대고 있”(「바람 부는 날」)었다.
“어머니의 세월이 앉”은 “멀구슬나무 옹이 옹이마다”
“뚝뚝 떨어지는 근심들” “이제 버틸 수 없는 끝자리”에 “바람을 맞으며 서 있”(「8층을 오르며」)는 어머니. “눈물을 닦”고 바라보면, “구만리 먼 곳에 계신 어머니”가 “5와트짜리 노란 전구를/ 밝혀 놓”고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꼿꼿이 서” 계셨다.
4.
시를 쓰다 보면, 쓰기 전에는 모르고 있던 것들에게 물음을 받을 때가 있다. 잊혀졌던 혹은 잃어버렸던 일들이 하나 둘 상기되면서 갖가지 물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인은 “나를 삼키려고 외쳐대”(「바람 부는 날」)던 세상의 거친 파도를 이겨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뒷모습 남기고” “허무한 자존심 버리고 가라”(「능소화」)라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묻고 또 물었다.
백영옥 시인은 시적 역동을 통해 양가감정을 수용하고 있었다.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시간이라는 ‘체’에 걸러지면서 여리고 맞갖은 정감으로 물음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 갖은 아픔을 삭이고 삭여서 희석하고 표백시켜서 어떤 지경에 이르고 그럴 때쯤 시인은 또 다른 물음의 가능 근거를 찾아 물음의 방향을 얻고 있다.
“목숨 줄 놓아버린 그때”(「그때 그곳에」)처럼 “아무도 들고나지 못할 울타리를 치”고 “얼음 같은 고집으로/ 응어리 품”어 “순백의 화려함으로/ 가장 순수한 한때를 위”하여 “찌르는 듯한 전율로 떨다가/ 차가운 슬픔 되어 뚝 떨어”지듯 “은빛의 냉정으로”(「선인장」) 삭이고 삭였다.
시인의 뜰에는 나팔꽃, 능소화, 선인장, 분꽃, 장미, 나리꽃 등 갖가지 꽃들이 물음의 시간마다 늘 피고 진다. 시인은 그 꽃들에게 있음의 사실과 그렇게 있음에 있어 대하여 물음을 던지고 물음을 받는다. 이 꽃들은 시인과 상사(相似) 관계를 이루고 동일시되어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표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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